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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갈 곳 없는 사각의 링 안에서 오로지 파이터 두 사람만, 그리고 또 오로지 주먹만으로 승부를 내야 해야 하는 복싱은 가장 원시적인 경기이자 잔인한 격투기입니다.
사람의 몸엔 무수한 급소가 있습니다. 하여 여타 무술들은 그곳들 중 하나를 골라 단 한번 타격을 가함으로써 상대를 고통 없이 짧은 시간 안에 쓰러뜨릴 수 있도록 발전해 왔지만, 이 권투란 운동은 오로지 손으로 몸통과 얼굴만 가격해서 쓰러뜨려야 승부가 나도록 룰을 정한 데다, 너클 베어도 아닌 두툼한 솜이 들어간 글로브를 이용하니 어지간히 두들겨 패지 않고선 승부가 나지 않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 목적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잔인성의 대리만족을 장시간 느끼게 함이니 분명히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고대 로마의 잔혹한 검투의 현대적 재현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일설에 의하면 글로브는 펀치가 주는 데미지가 점진적으로 쌓이도록, 그리하여 오랫동안 두들겨 맞으면서도 버틸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니 제아무리 천재복서라 해도 펀치 드렁크를 피해갈 순 없습니다.
황관장네 클럽을 나간 지 아마 7개월 정도 됐을 때 일입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낮술에 불쾌해진 얼굴의 중년남 셋이 씩씩거리며 들어옵니다. 다짜고짜 날 보고 경기를 해야겠다, 심판 좀 봐줘라. 딱 보니 술 먹다 감정이 격해져 그런가 본데, 아무리 연습용 글러브라 해도 충격이 대단해선 일반인에겐 손을 못 대게 하는지라 관장부터 불렀습니다. 알고 보니 하난 중학교 때 선수 생활을 했고 또 하난 근래 들어 다른 도장에서 몇 개월 수련했는데 니가 세니 내가 세니 다투다 한번 붙어 보자.
참.... 그 나이에 저런 열정이 있다니 부럽기도 하고. 킥킥 웃으며 관장이 나에게 둘에게 장비를 주라고. 하여 헤드기어, 마우스피스와 글러브를 줬더니 선수처럼 붙겠다네요. 위험할 텐데.
3분 쉬고 1분 쉬는 룰이 쉬워 보여도 막상 실전에 들어가면 전혀 아니 옵니다. 링에 올라가는 순간, 도망갈 곳도 없고 주변엔 구경꾼이 우글우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 이겨야 내려올 수 있으니, 온몸은 긴장으로 뻣뻣해지고 심장 박동은 증기 기관차처럼 칙칙폭폭. 일반인은 2분 이면 이미 마우스피스 사이로 여름날 축 처진 도사견처럼 거품과 침일 줄줄 새고 하늘이 노래질 겁니다. 여기에 술까지 마셨으니. ㅡㅡ;;
'3분 3회전 하실래요? 아니면 3분 2회전?'
'2회 전 콜!'
에구, 이미 두 친구는 친구가 아닌 두 마리 황소가 되어 난타전을 벌이는데 쨉이고 뭐고 기냥 도낏자루 휘두르듯, 게다가 나이는 속일 수 없는 법, 이미 퍼마신 술기운이 더해지니 채 1분이 되지 않아 다리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좀 더 지나자 입에선 거품이 뿜어져 나오는 게 보이고 간혹 터지는 펀치에 얻어맞은 상대는 살기까지 뿜어냅니다.
그날따라 웬 여성회원이 글케나 많은지. 상황이 더 꼬입니다. 소릴 질러대는 남자 회원들 사이에 핫팬츠 차림의 츠자들이 오모, 어머 하니 두 양반, 이젠 숨이 차서, 그리고 얻어터져 폭발한 화까지 더해 얼굴은 붉다 못해 시커먼스가 되어 가는데, 아무리 봐도 어느 한쪽이 죽기 전엔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결국 그들 모르게 2분으로 줄이고 쉬는 시간을 2분으로 늘여 2회전을 마쳤고 관장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두 양반의 팔을 들어 줍니다.
이미 운동을 마친 난 샤워실로 갔는데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들어오더군요. 어색한 웃음을 짓지만 입가에 침이 질질 흐르는지도 모릅니다. 샤워기 꼭지를 거꾸로 돌리며 물이 안 나오네, 한 사람은 비누를 밟아 넘어지고. 잘못하다간 사람 잡겠다 싶어, 둘을 일단 앉히고 찬물을 살살 뿌려주니 정신이 돌아오나 봅니다.
'이젠 이런 거 다시 하지 마세요.'
'눼~~'
고등학교엔 복싱부가 있었습니다. 그 나이 땐 다들 혈기 방장하고 뭐라도 하나 배우면 실력 발휘해보고 싶어 손이 근질거리지요. 당시 학사가 얼마나 개판이었냐. 이 친구들은 1주일에 한두 번, 그것도 오후에 나와서 2-3시간 있다가 하교합니다. 운동해서 학교 이름 드높여야 하는 사명이 있었으니. 하지만 독사눈에 늘 그게 마땅찮았고, 일설에 의하면 그 때문에 교장과도 다툼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어느 날 점심시간에 한무리의 애들이 우르르 몰려갑니다. 필시 사고가 터진 거겠지요? 그럭저럭 뒷자리에 앉아 수업시간에 씨잘데기 없는 농이나 날리고 화장실에 뻐끔담배질하던 한 녀석이 오라지게 걸렸네요. 몇넘이 둘러싸고 주먹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는데 아무도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녀석은, 아마 평생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어들 텐데. 그때,
'너거 머하노? 아이고 이기 누꼬? 우리 학교으 자랑, 복싱부 선수님들 아인교?'
아무리 겁대가리가 없어도 독사만큼은 겁을 냅니다. 왜냐? 이 양반 역시 그들보다 더한 시절을 지내왔으니까요.
'요즘 권투는 한 사람 두고 여러 명이 모다구리 뜨는 걸로 룰이 바낐나 보네? 그런데 조깨 거시기 하네.'
앞에 박힌 금니가 반짝거리도록 씨익 웃더니
'씨벨룸들아, 운동 배워 힘 쓸데가 그리 없어 친구한테 휘두르나? 너거 코치가 그리 가르키더나? 개떼처럼 공격하라꼬?'
감정이 격해지면 아무리 권투라도 반칙이 나옵니다. 낭심을 친다든지, 뒤통수를 가격한다든지. 혹은 머리로 받는 버팅 등등. 그래서 심판이 같이 뛰는 것이고, 그 심판의 눈에 반칙으로 보이면 중단하고 벌점을 주든지 아니면 실격패 처리하고 말죠. 반칙 선언 전까지 그가 아무리 뛰어난 기량으로 잘 싸웠다 하더라도, 혹은 고의가 아니더라도 승패에 영향을 줄만 했다면 예외가 없습니다.
난 이 나라에 수십년 살며 공정한 룰이 적용된 경제주체들 간의 게임을 거의 본 바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고통은 아주 당연하다고 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 가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만하라고 외쳐도, 정권을 바꿔도 소용 없습니다.
하찮은 개돼지들이 심판으로 나서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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