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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만나 고마운 분 덕에 오늘 좀 쉴 수 있다.
괴담이라고 하기까진 그렇지만 막강 재벌의 부침을 몸소 겪은 나로썬 작은 흔적이라도 남겨야 도리가 아닐까 싶다. 이하 전부 실화지만 가명 처리했으니 양해 바란다. (도리는 무슨.. 이야기하고 싶어 진즉부터 입이 근질거렸구만.)
지금 아해들이야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당시엔 내가 전공한 과는 졸업 전에 일부 개인 사정이 있는 애만 빼고 거의 다 취업이 확정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구인난, 어지간한 중소 재벌은 쳐다 보지도 않던 시절이었고 지금은 하늘을 찌를듯이 대단한 몸값의 은행원도 월급 적고 일은 많은데다 꽁생원들이라 하여 혼담에선 박대 당했었지. 그뿐이랴? 선생 똥은 개도 안먹는다고, 교대나 사대 진학을 극력 반대하기도 했었다. ㅋ
여하튼 강간미수범으로 시방 지명수배되어 도주 중인 넘의 애비가 회장으로 있던 기업에 면접 보러 가서 전무란 인간과 대판 싸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중소기업에서 몇달 기다가 결국 몸 담은 곳이 정X 빌딩에 있던 재벌의 모기업이었다.
여기서 생긴 일들은 이미 언급했고 또 앞으로도 이야기하겠지만 여하튼 당시 난 70-80년대 최고의 직장 중 하나였던 곳에 끝물로 입사한 셈이었다. 왜냐구? 거진 60여명에 달하던 동기들이 입사했던 그 해를 기점으로 회사는 망가지기 시작했고 결국 10년이 채 되지 않아 법정 관리를 거쳐 완전히 없어져 버렸으니까.
그러고 보면 같이 몸 담았던 이들 중 제대로 된 녀석 또한 거의 없으니 이 역시 地氣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씨잘데기 없는 회상도 가끔은 허지.
하여간 이 빌딩은 꽤나 유명했다. SS 타운을 등지고 땅콩네와 맞서는 형태. 그러나 이미 그 회사가 들어가기 전인 70년대에 율촌인지 뭔지 하는 재벌이 입주했다가 공중분해되었고 이후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다른 재벌이 또 사옥으로 쓰다가 콩가루가 난 이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웃기는 건 이 건물의 설계자가 대한민국 디자인 역사에 큰 족적을 넘긴 유명한 이였고 그로 인해 종종 미관이 뛰어난 건물 혹은 유서 깊은 건물 등으로 당시 종종 인용되었다는 사실이거든. 하여간 이 터가 얼마나 재수가 없냐 하면, 유동인구로 따지자면 명동 못지 않았지만 건물 앞 주차장과 인접한 상가에 입주하는 약국, 병원, 식당 뭐든 다 망해 나갔다.
워낙 술을 줄기는 분위기라 아침이면 쓰린 속을 부여잡고 주자장을 가로질러 자리 잡은 약국에 술 깨는 특효약을 사러 가곤 했는데 입사 후 1년이 지나서 어느날 갑자기 문을 닫더라고. 하여 영문을 캐보니 아뉘, 약사 자격증도 없는 색휘가 거기서 지 꼴리는대로 약을 조제해서 팔다 걸렸고 그 김에 문을 닫은 거지. 참나.
다시 화제로 돌아와서.
입사 첫해엔 대단했지. 차장 이상은 거의 스카이 출신이었고 그만큼 프라이드도 대단했고. 그러나 해가 지날 수록 망조가 드는 거야. 원래 이 가문이 정략결혼으로 유명했었는데 장남은 과감하게 집안에서 정해주는 혼처 대신 사랑을 택했거든. 몇십년 전 일이지만, 그로 인한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모양이야. 당시 기획실 핵심 중 하나와 친분이 있었던 터라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 결혼은 끝내 인정을 받지 못했고 결국 이혼을 한 후 장남은 술로 세월을 보냈던 모양이야. (워낙 술을 좋아했었던 탓도 있었고.)
결국 그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조타수를 잃은 회사는 그때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지. 하지만 사실 그 회사를 날려먹은 장본인은 따로 있어. 독불장군 전무였는데 개국공신들이 모두 반대하던 사업을, 장남을 꼬드겨 발을 들이게 했고, 그것이 결국 부도의 빌미가 되었다는게 내 판단이야. 니가 뭔데? 내가 누구였냐 하면.. 그것을 입증할 만한 데이타와 분석자료를 만든 장본인이었걸랑. 꼽냐? ㅋ
그리고선 법정관리란 청천벽력같은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 당시 이런 일화가 있었어. SS타운 조성을 계획했던 식물인간씨가 이 빌딩을 사겠다고 했다가 퇴짜를 맞았는데 그때 회장이 '내가 니 회사를 사마.' 했다나. 하여간 밀양부터 부산까지 경부철도 좌우론 그 영감네 땅이었단 이야기도 있고 보면 뻥은 아니었을 거야.
이런 일도 있었지. DH선주란 국영기업이 매물로 나왔는데 당시 쟁쟁하던 회사들이 전부 덤벼들었어. 가장 인맥이 좋았던 우리가 물망에 올랐지만 막판에 땅콩 일가가 신군부를 등에 엎고 새치기 했다네? 하지만 이 땅콩네도 배 다 팔아먹고 결국 지금 거덜나기 일보직전이지? 운수업을 들여다 보면 말이야, 앞에서 벌어 뒤로 다 까먹는 구조임에도 국가 기간 산업 혹은 국적 선사 혹은 항공사란 타이틀만 걸고, 빚 얻어 좀비처럼 연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잠시했던 화물을 예로 들어볼게. 나갈 땐 짐을 실지만 들어올 땐 공차다. 돈이 되겠어? 그러니 짐 찾아 귀환점과 젼혀 다른 곳으로 뛸 수 밖에. 힘은 졸라리 들고 차는 망가지고. 몇푼 더 벌지만 기름값, 유지비로 다 털어먹지. 게다가 사고라도 한번 나봐. 몇개월 일한 거 한방에 다 날라가거든.
나가는 걸 아웃바운드, 들어오는 걸 인바운드라고 하지. 우린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야. 나갈 땐 완제품, 그러나 들여오는 건 원재료들이지. 그러니까 나갈 땐 컨테이너 선인데 들어올 때 광탄선이나 원목선이야. 즉 들어오는 배는 텅텅빈 거지. 돈이 되겠냐고. 결국 땅콩네도 구조적으로 정부 지원없인 살 수 없는 기업에 목 매다 폭싹한 것이고 그런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다 이 빌딩의 망령이 농간을 부리지 않았나 싶기도 해.
그리고 마지막이 A 생명이야. 회사가 매각한 보험 회사를 인수해서 야심차게 진출한 독일계 금융사. 그러나 다른 외국계 금융사들은 약진에 약진을 거듭했지만 유독 이 회사만 뒷걸을질치다가 퇴출 일보직전까지 갔지? 그리고 빌딩을 매각하고 다른 곳에 둥지를 틀었나 본데, 요즘 그럭저럭 버티지만 여전히 꼬바리에서 헤메고 있어. 내 보기엔 몇년안에 골로 갈 것같은데.
난 운명이 있다고 보진 않아. 운명이란 건 다 각자가 가졌었던 시간 속의 오류가 만들어내는 당연지사지. 선택을 잘 해야해. 뽑기나 찍기가 아니라 정답을 잘 보란 거야.
그래서 그 곳의 사진을 찾아봤지만 이미 한장도 남아 있지 않더군. 걸린 사진은 최근 사진이야. 오피스텔이니 뭐니 들어섰나 본데 가능하면 그 근처도 가지마. 서X문 자체가 재수 없는 동네야. 땅콩네도 그렇지만 사진 우측에 있던 어마무시하게 성장하던 모 건설사도 망해서 외국계로 팔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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