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길 위에서 묻다

이젠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운산티앤씨 2019. 9. 5. 12:30


.

바늘을 찾을 수 없는 카트리지..

.

https://youtu.be/B7EKtj7XBCg?list=RDgb8Vc2JCjPU 

.

그제였나? 서울 모처에서 구순 노모와 50대 지체장애자 아들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어제 둘째 아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어 수배되었고, 오후엔 한강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말들. 죽은 이들을 두고 둘째가 몹시 고민이 많았다는 것, 그리고 결국 일도 못하고 이들 뒷바라지를 하며 힘들어 했다는 것.

패륜적인 범죄임은 분명하나 이번엔 누구도 욕을 하지 않더라. 그만큼 살기 힘들다고 다들 인정하며 또한 그런 극단적인 선택에 공감하고 있어서 일게다. 물론 이 두 사람이 기초생활보호자 대상자였다곤 하지만 그 돈으로 병든 두 사람을 감당할 수도 없음은 명백하다. 게다가 둘째 입장은 어떤가? 혼자 살겠다고 자신을 키워준 어미와 불쌍한 형제를 버리겠는가.

이건 분명한 제도의 맹점이다. 만약 둘째가 천륜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자취를 감추었다면? 분명히 이를 안 동사무소 사회복지사가 어떻게든 조치를 취했겠지만 그가 있었던 한, 달리 방도 또한 없으니, 결국 제도가 세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셈이 아닌가.

이제부터 모진 소리 좀 하려고 한다. 요즘 거리에 나가보면 애들보단 노인들이 눈에 더 많이 띈다. 특이할 것 없는, 몇년 전부터 느껴오지만, 점증하는 현상이다. 애들이 태어나지 않는다고 온통 난리법썩을 피우고 피같은 세금을 퍼부어도 점점 더 나빠져 이젠 출산률이 0%대에 도달했단다. 머잖아 어쩌구 저쩌구를 떠나 당장 해마다 대학가는 자원들과 군자원 충원의 어려움만 봐도 이미 답은 뻔히 나온다. 그래서 대책을 세운다고? 여태 세운 대책이 전부 무용지물인데 어떤 대책을 또 세우겠다고? 허무맹랑하게도 신혼에겐 무조건 집을 주고 님자든 여자든 1인에겐 평생 직장을 보장한다면 가능할 것 같은가?

양육환경이 나빠져 자연스럽게 감퇴하는 출산율이 문제라면 양육 환경을 개선하면 될 것이란 말같지도 않은 잡소리리는 입안에서 씹기만 하라. 한정된 자원에 붙어 사는 무리 수가 너무 많아 생기는 필연적인 문제인데, 우리가 무슨 창조주도 아니고 더이상 나빠질 구석도 없는, 극한의 양육 환경을 개선할 무한 성장의 경제동력을 어떻게 마련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그대로 두자니 사회적인 불만과 갈등은 포용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세 사람, 사실 더 살기를 바랬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슨 소릴 하고 싶냐고? 탄생이 부모의 자의적 결정이었다면 독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성체들에게 삶의 지속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는 거지. 한편 어느 동네 다리에서 연달아 9명이 자살을 해서 난리라네? 툭하면 거론되는 OECD 최고의 자살율, 또 이걸 전부 정부의 경제 정책 실패로 돌린다?

아무리 막아도 갈 놈을 가고야 말고 그걸 말렸다고 나중에 그때 날 말려줘서 감사하단 이야기도 그닥 들어본 바 없다. 고작해야 자살 충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그.나.마. 찾은 자들이나 하는 소리지.

정말 진지하게 묻고 싶다.

무한 경쟁과 자연 도태가 엄염히 살아 숨쉬는 정글 속으로, 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개체들을 억지로 살라고 등 떠밀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게 하는가. 이들에게 그런 강압을 할만큼 충분한 대책도 없고 후원도 못하는 주제에. 다시 말하건데 창조주로써 무한 성장의 동력을 마련할 수 없다면, 지금 아니라 과거, 혹은 미래 누가 정권을 잡아도 지금 상황에 대한 해답은 내놓을 수 없을 것인데?

혹자는 이런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의 인정은 부도덕하고 범법적인 행위를 가져올 수 있다고 반대를 하더라만은 편의점에서 파는 감기약에도 부작용은 있음에야 그야말로 기우가 아닐까 한다. 생명, 소중하다. 그래서? 나의 명을 내 의지로 끊는다 해서 인명경시 풍조가 만연해서 사회 시스템이 무너진다고? 죽고 싶은 놈보다 살고 싶은 놈들이 더 많은 세상에서 이 무슨 얼토당토 않은 언어도단인가.

종교는 이리 말한다. 누군가 너에게 운명을 주었다고 혹은 숙명을 주었다고. 그게 뭔데라고 물어보면 귀의해서 알아서 찾으라고 하지. 더 골때리는 건 내 삶의 이유는, 나도 뭔지 모르지만 다 누군가의 뜻이라고 하는데, 과감하게 묻노니 그런 개소리를 지껄이는 자들 중에 이미 골로 간 자들에게 따신 밥 한그릇이라도 제대로 마련해 준 자가 있기는 한지. 어떤 형태의 지원이든 삶의 의지를 상실한 자, 찾지 않으려는 자에겐 꺼져가는 불빛을 조금 더 연소할 수 있는 한줌 연료는 될 지언 정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가 없다.

너무나 비관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젠 인간에겐 두가지 선택만이 남았다고 본다. 무한대로 증식하는 개체 수를 인륜과 도덕, 윤리를 앞세워 용인하다가 전멸하든지, 아니면 보다 현명하게, 무자비한 자연의 선택을 피해 인위적인 증식의 억제 수단을 마련하든지.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전쟁을 통한 대규모 살상행위지만, 그건 최악이고 미치광이나 선택할만한 악수가이다.

그렇다면 차선은 한가지 뿐이다. 더이상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성체들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고 더이상 출산을 장려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 저기 낭비되고 있는 재원들을 건강한 성체의 자립에 사용하야 한다. 너무 잔인하다고 하지 말기 바란다. 누구나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몇년 전부터 헐리우드 영화에선 이런 극단적인 인구 조절 방식이 바이러스나 핵, 혹은 너무도 우스꽝스러운 스냅 핑거를 통해 실시되어야 한다고 간접적인 시그널을 보내 오고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불치의 병에 이르러 더이상 연명 치료가 의미가 없는 자들에 대한 안락사 뿐만 아니다. 자의로 삶의 연장을 거부하는 이에게도 마땅히 그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정글의 법칙보다 보다 윤리적이지 않는가.

오늘도 신문은 시끄럽다. 이미 다 드러난 사실을 다시 폄훼하고 훼손하고 가공하여 보기 좋은 독버섯으로 바꿔 보는 이들에게 먹으라 유혹한다. 그것을 비난하기 전에, 왜 이런 황당한 짓들이 나오는 지를 생각해 보라. 이 모든 사단의 시작이 결국 넘치는 인구 탓임을 왜 모를까.

소위 말하는 경제대국들, 세계 10위 권 안에 있는 국가 중에서 인구밀도를 따져 보기 바란다. 그 발전이 과거 조상의 현명한 선택 여부에 따랐다고 생각한다면 개발도상 혹은 미개발 국가의 인구밀도도 따져 보라. 세상 어디에도 과밀하지 않다면 행복지수가 높을 것이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람보 하나가 방위병 100명보다 낫다면서? 김동현 하나가 조폭 수십명을 상대한다고 들었다. 왜 돼도 않은 대가리 수를 가지고 국방을 논하는가? 김동현과 람보가 10만 명이면 뭐하나? 쓸만한 마사일 한방이면 도시 하나가 날라가는데? 어떤 등신은 전쟁의 긍극적이고도 최후의 형태는 백병전이라 결국 땅개의 수가 승패를 좌우한다는 10소리를 지껄이던데. 참... ㅎㅎㅎ

줄어드는 진학 희망자들의 감소로 대학을 구조조정하면 그 문은 여전히 좁을지 모른다. 또 조정해도 마찬가지일 테지. 하지만 이건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뜻이다. 그 대학을 가려고 하는 자원들의 목적이 대학이 아니지 않은가. 보다 좋은 직장을 잡아 남들보다 부유하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자 함이 아니든가?

다시 보자. 대학을 들어가는 문은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 허접한 대학들은 역사 속으로. 절대적인 대졸자의 감소가 필연적이다. 기업은 매년 성장해야 하고 그런 자원의 수혈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수가 줄어든다면? 4차 산업으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의 노동력을 요구하는 곳은새롭게 만들어져 넘칠 것이다. 대학 자원도 줄고 가지 못한 자원도 줄어든다면? 누가 직장 없이 놀고 있을까. 사람이 없는데 집값은 가라 앉을 것이며 보다 넓고 쾌적하게 확보된 공간 속에서 우리들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요즘 가게에 오시는 분들 대다수는 정부때문에 경기가 개판이라고들 하신다. 틀린 말도 아니라고 호응해 주고싶지만.. 전적으로 맞지 않다. 왜 그럴까? 그들과 기억 속에 남은 호경기란 환영은 저녁마다 불야성을 이루는 거리와 넘쳐나는 인구로 표면적으로 활기를 띄는, 왜곡된 옛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세대가 가진 기억 속의 그 모습들이 정상이었냐고 나부터 자문해 보면 전혀 아니란 결론이 나온다. 왜 집에 가지 않고 밤새 술믈 퍼마시며 흥청망청거렸는지, 왜 애들이 기다리고 마누라가 밥상을 차려 놓았는데도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는지. 호경기라서 그랬나? 사상 최악의 불경기란 말을 15년 째 듣고 있는 나로썬 그야말로 뜬금포이다.

이젠 정말 급격한 노령 인구 증가에 대한 대비와과 더이상 살 의지가 없는 자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아무 짝에도 쓸데 없는 인구 증가 정책을 버리고 적정 인구 수준까지로의 연착륙을 기획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이 진흙탕 개싸움 꼬라질 보지 않을테니까.




'세상 이야기 > 길 위에서 묻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마 하지?  (0) 2019.09.17
IRB와 KGCP에 대하여...  (0) 2019.09.12
의미심장한 한마디?  (0) 2019.08.30
왜 그런지 알겠다능...  (0) 2019.08.26
아덜을 군대 보내기 실타...  (0) 2019.08.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