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길 위에서 묻다

이게 미치지 않고서야..

운산티앤씨 2019. 8. 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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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AgnJDJN4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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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스타크 실사판 엘론 머스크란 눔이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군요. 인간의 뇌를 컴퓨터와 연결한다. 그리고 드러난 계획에는 인간의 생각을 업 혹은 다운로드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예견된 미래상 중 하나였지만 AI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 여겨 시도를 했다는데.

기사만 봐선, 아마도 그에게 있어서 AI는 터미네이터의 스카이넷처럼 각인되어 있나 봅니다만 조니 뎁 주연의 폭망작 트랜센던스 (Transcendence/초월)에선 컴퓨터로 업로드된 인간이 어떻게 인간성을 잃어가며,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로 변해 가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참, 이 글은 영화적 내용과 개인적 상상 혹은 의견을 버무려 쓰는 것이니 심각하게 보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아래의 글들은 이전에 쓴 글에도 나와 있어 일부 재탕임을 감안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지컬한 진화의 벽에 부딪힌 인간, 발달하는 기술을 따라 잡을 수 없는 인간, 그리고 무한대로 확장되는 시공간에 적합하지 못한 신체구조를 가진 인간은 필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그런 필요를 절감할 수 없었던, 아주 오래 전부터 상상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상상들은 이미 실현되고 있거나 현실화 가능성을 점점 더 높이고 있습니다.

첫번 째 인위적인 진화는 인공장기로 대표되는 대체 인체의 등장입니다. 훼송된 심장이나 기타 주요 장기의 대체물의 개발에서 시작된 의료공학은, 3D 프린터 기술을 활용하여 머잖은 장래에 뇌만 빼곤 전부 인공물로 인체 대부분을 교체할 가능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때가 오면 인간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내려야 할까요? 인공적인 부분이 전체의 50%를 넘으면 인간이 아닌 로봇으로 간주하고 모든 권리를 박탈해야 할까요? 그게 과하다면 70%?

그와 동시에 AI는 AI 대로 오픈된 플랫폼에서 무한반복학습을 하며 급속도로 발전할 것이고 어차피 제한적인 노동력을 대체할 완전한 로봇 역시 가능해질 것입니다. 깡통 로봇과 생각하는 로봇. 물론 킬 스위치를 두니 어쩌니 하지만 독자적인 사고체계는 창조 능력의 겸비도 의미합니다. 통제 가능할까요? 독자적으로 사고하며 창조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하여 이미 뒤쳐진 인간이 어떻게 제한과 제약을 둘 수 있을까요? 그들 역시 인류의 한 부분으로 인정해야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마지막은 귀찮은 외피 따위 없이, 오로지 양자나 전자의 공간에만 존재하는 인간의 출현입니다. 아마 엘론 머스크는 이런 존재들로 인해 AI나 반기계인간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러한 존재가 오로지 형생 인류가 정의하는 선만을 추구해서 인류 복지에 기여하리라고 단정짓는 건 너무도 순진합니다.

모든 기술의 최초 출현 시점에선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는 난해함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은 일반인도 이해 가능한 수준으로 변합니다. 수준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용어와 규격의 통일로 인한 보편성의 부여입니다. 그리고 그런 보편성의 부여에 따른 오픈된 지식의 공유는 그 기술의 발달을 가속화시키게 됩니다..

이런 예제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컴퓨터는 어떨까요? 처음엔 전문가가 아니면 만질 수 없었고 그나마 윈도우즈라는 운영 시스템이 탄생하면서 일반인도 사용이 가능했지만 역시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신비와 미지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초등학생도 데스크 탐 정도의 컴퓨터는 자가 제작할 수 있고 얼마든지 자신의 목적에 맞게 프로그램을 구성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기술이 그러했다면, 인간의 뇌속에 자리하고 있는 기억이나 사고체계의 업로드도 언제까지고 비밀로 남아 있을 수는 없으며, 또한 근접해서는 안되는 금역의 붕괴는 시간 문제일 뿐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순간, 그 방법은 질이 좋지 않은 자나 심지어는 범죄자의 도피처가 될 수도 있지요.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때론 사람의 몸에 있다가 필요하면 유체이탈하듯 사라져서 통제할 수 없는 공간에서 활동하는 존재를 인간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지극히 사견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존재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모든 감각이 사라져도 고통만은 느낄 수 있어야 최소한의 인간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타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눈물을 흘릴거나 웃을 수 있는 능력의 보존, 즉 인간일 수 있음은 고통이란 피지컬한 반응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며 공유할 수 있고 또 언제든지 느낄 수 있어야 가능합니다.

뾰족한 것에 찔리면 아프다. 뾰족한 것을 몰랐을 땐 찔리기 전까진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을 땐 무의식적으로 회피하려 듭니다. 그리고 비숫한 모양만 봐도 두려움을 느끼며 신체는 방어 준비를 하죠. 또한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타인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주려 하고 아픔에 공감하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즉 고통과 고통으로 인한 공포 혹은 두려움은, 누군가를 인간임을 입증하는, 모든 감정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존재들은 그런 고통에 대한 기억은 저장할 수 있어도 영혼으로 느끼며 반응하는 인간을 흉내낼 수는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적절한 제어가 그런 존재들에 대해 가해지지 않으면 인류의 종말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말살계획에 의한 것이 아닌, 자연적인 사멸로 귀결될 가능성이 매우 높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자리를 뺏은 현생인류의 예에서 보듯이 뛰어난 종의 탄생은 호모사피엔스의 멸종을 불가피하게 할 것입니다.

비록 인간성, 휴머니티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보다 우월하며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들로의 대체는 우리에겐 Apocalypse이지만 생명의 긴 역사에서 본다면 진화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또다른 멸종에 금방 도달할 것 같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가 정의하는 인간성과 흡사한, 기준과 규격을 만들어 그들 세상의 질서를 잡아갈테니까요. 이는 추측이 아닙니다. 여태까지 나타났던 모든 생물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들이니까요.

종의 멸종을 우린 환경적인 요소에 결부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난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생존하는 동안 직면한 환경에 적합하도록 신체 구조를 변경한 탓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스스로 내린 정의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인간이 만든 인간성처럼 말이죠.

앞의 설명은 인간성이 더이상의 유효성을 갖지 못했을 때 멸종에 직면하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멸종에 직면한 호랑이나 사자를 그 예로 들어 설명해 볼까요? 그들이 멸종으로 치닫는 이유를 인간의 환경 파괴에서 찾습니다.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 상태 그대로 였다면 앞으로도 계속 생존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을 인위적이라 정의하고 자연에 위배된다는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인위적이라고 하며 자연을 보호의 대상으로 보는 건, 인간 스스로 자연을 초월한 존재라고 하는 으시대는 언행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린 자연 이상의 신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만약 인위적인 행동도 자연의 일부라면 사자의 멸종 역시 자연스러우며, 그 종말은 사자가 스스로 만든 혹은 정의한 가치의 붕괴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난 사자야. 다른 동물을 잡아먹고 사는 최강의 육식동물이지. 물론 사자들이 그리 생각하진 않지만 스스로 정하고 발전해온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강한 존재인 사람이 나타나서 세상을 지배하며 사자의 정의를 능가하게 됩니다. 결국 사자는 자신이 내린 정의를 실현할 수 없으니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닐까요?

결론적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의 창조는 영화적인 상상처럼 비극적인 파멸을 가져오진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인간성이란 가치의 붕괴 혹은 유효성 상실로 인한 지배적인 종으로 자연스러운 교체라는 거죠.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인류의 진화가 아닙니다. 비극적이지 않은, 인류 스스로도 느낄 수 없는 멸종이라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