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길 위에서 묻다

검정 각반들... 마무리

운산티앤씨 2018. 2. 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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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Bittersweet Life OST - "A Honeyed Question"



난 검정 각반들 중 빨간 명찰들이 제일 싫다. 으스대는 건 둘째치고 무엇보다 술만 마시면 개가 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친구 때문에, 일 때문에 이들과 어쩔 수 없이 어울렸지만, 하여간 단 한 번도 조용히 넘어간 적이 없었다.

복학까진 꽤 시간이 걸렸던 난 시간만 나면 바닷가 포장마차에서 죽치고 술을 마셨다. 그 꼬락서니가 한심했던지 감포에서 온 포장마차 여주인이 오죽하면 자주 들리는 여대생들과 미팅까지 주선했을까. 그리곤 이젠 술 좀 그만 마시고 참한 색싯감이나 찾으라고. 하지만 난 그다지 땡기질 않았다.

이전 직장 내 성희롱 때문에 알게 된 기집애. 그 정도 호의였으면 뭐라도 벌어졌겠지 상상하시겠지만 난 손끝도 대지 않았다. 난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원하지도 않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여잔 나에게 귀찮기만 한 존재다.

소싯적에 사창가 한번 가보지 않은 남자가 있겠나. 완월동이니 자갈 마당이니 옐로 하우스니, 그리고 북창동 룸살롱까지. 가위바위보를 해서 차례로 입장하기도 했고 다들 보는 데서 난장을 치기도 했지만 난 한 번도 그 여자들과 뒹군 적이 없다. 같이 있을 땐, 주무르고 빨고 하다가도 각자 방으로 흩어지면 몇만 원 쥐여주곤 나가라고 하든지, 아니면 떨어져서 자라든지.

빨간 각반은 갓 일병을 달고 칼같이 다린 옅은 국방색 군복에 세무 가죽 군화까지 멋들어지게 차려 입고 첫 휴가에서 나와 동석을 한 게다. 친구의 친구니 친구지 뭐. 거나하게 술에 취했을 무렵, 난 갑자기 빨간 각반이 보이지 않음을 알았다.

'야, 니 친구 어디 갔노?'
'몰라? 오줌 싸러 갔겠지.'

그때 감포집 주인장이 쑥 들어오더니 저쪽에서 난리가 났단다. 빨간 각반 하나가 검정 베레모에게 두들겨 맞고 있다나? 흐미 싶어 냅다 뛰어나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빨간 각반이 두 명의 검정 베레모에게 한참 얻어터지고 있었는데.

곱게 차려입은 군복은 이미 쉴 새 없이 흐르는 코피로 물들었고 유난히 눈에 띄는 그 군화는, 횟감용 생선을 씻다 버린 구정물에 빠져 짚신 꼬라지가 되어 있었다.

가슴이 아픈 일이다. 그 이전 다른 빨간 각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연즉은 그 동네 일병들은 계급장을 붙이고 나간 첫 휴가에선 어떻게든 지보다 센 놈, 그러니까 휴전선에서 노는 국방색 각반이나 검정 베레모에게 시비를 걸어 깨고 들어와야 한다나? 그게 그 동네 출신이면 다 통과해야 하는 관문인지, 아니면 일부에게만 통용되던 외계 의식인진 모르겠다만 내가 만난 빨간 각반들은 술만 마시면 그렇게 시비를 붙이고 다녔다.

하지만 검정 베레모들도 이번엔 동네를 잘못 골랐다. 그 동네가 어디냐 하면 영화 '친구'에서 꼬맹이 넷이 모여 조오련이 빠른지, 물개가 빠른지 하며 내기를 하던 곳이었으니까. 세상 모르고 깨춤 추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길바닥에 널브러져야 하는 골 때리는 동네인데 말이다.

불알친구 두어 명과 난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만하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피를 보고 눈이 뒤집어진 그들은 이젠 주먹을 우리에게 겨누는 게 아닌가. '어익후'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B는 비록 친구이긴 하지만 내심 두려운 애였다. 친구들에겐 절대 그러지 않았지만 모르는 이가 그를 건드리는 순간, 피를 봐야 끝을 맺는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어' 하며 우리가 뒷걸음질을 치는 순간, 이미 그 손엔 깨진 소주 병이 들려 있었고 곧바로 둘 사이로 돌진해 들어가더니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선 옷을 다 벗는 게 아닌가. 달랑 걸친 팬티엔 베레모의 피가 흥건히 묻었고 그들은 비틀거리며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정말 큰일 나겠다 싶어 놈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헤드록을 걸었고 한참을 지나서야 B는 진정을 하고 옷을 달라고 했다. 나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 때문에 이게 뭔가. 여전히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그 새끼들 잡아오라고 주저앉아 난리치는 빨간 각반의 아구창을 사커킥으로 날려 버렸다.

A는 직장 상사이자 대학 선배이기도 하며 그 악명 높은 빨간 각반 출신이다. 워낙 평소엔 젠틀해서 곧잘 농담도 주고받고 잘 지낸 터였다. 하지만 그 개너므 부장 놈과 시비를 붙은 후 점점 사이가 나빠졌다. 왜냐하면 그 역시 그 부장의 수하였기 때문이다. 난 이미 그에게 왜 내가 그렇게 악독하게 대하는지를 설명했건만 이놈은 천지 구분을 못하고 기집애가 없는 자리에서 더러운 소릴 지껄여 댔다. 이미 나와는 상관이 없는 여자지만 그 여자를 욕하는 건 돌려 치기로 날 욕하는 게 아닌가. 점잖게 몇 번이고 하지 말라 했건만 기어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아마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을게다. 덕수궁 돌담길에는 소담스럽게 눈이 쌓였고 연인들은 잊지 못할 밤을 예약하며 개수작을 부릴 때 나를 비롯한 솔로 몇은 근처 호프집에 앉아 오늘은 어디로 가서 2차를 땡기느냐로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A가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동석을 한 게다.

'넌 왜 학교 얼굴에 똥칠을 하고 질알하냐?'
'먼 소리하십니꺼?'
'그 씨발년이 뭐라고 부장을 갈구고 난리야. 그냥 모른 체하면 그만이지.'
'그기 선배하고 무슨 상관인데예?'
'부장이 너하고 같은 학교 출신이라고 자꾸 날 갈구잖아.'

그건 참 미안한 일이긴 하다. 하여 난 면목 없다 사과를 하고 술을 따르는데 갑자기 술병을 쥔 내 손을 뿌리치는 게 아닌가. 술병 깨지는 소리에 다른 좌석의 이들이 뭔 일인가 싶어 쳐다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안되겠다 싶어 잠깐 바람이라도 쐬자고 나는 그를 데리고 나갔다.

'너 그따위로 살 거야?'
'네, 잘못했심더. 앞으로 조심하께예.'
'대가리 박아.'
'???'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 싶어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불이 번쩍했다. 장갑 낀 손으로 내 귀싸대기를 날린 건데.

'와 이랍니꺼?'
'이빨 꽉 깨물어.'
'이라지 마이소. 안좋습니더.'
'뭐야. 개겨본다는 거야? 차려, 열중 쉬어..'

이거 참... A는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내 머릴 쿡쿡 찌르며 뺨을 모욕적으로 때렸다.

'하지 마라 켔다 아이가, 씨발러마.'

A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설 수가 없었을 게다. 가뜩이나 취한 몸에 정통으로 턱을 맞았으니 그대로 눈바닥에 나뒹굴고 일어서다 미끄러져 자빠지고.

그래, 나한테 선배가 왜 필요하노?

난 친구나 수평 관계가 아닌 모임엔 가질 않는다. 특히 동문회, OB 모임 등등은 아주 질색이다. 모이기만 하면 술에 취해 개가 되고 더러운 농담을 입에 올리고 짜드라 아름답지도 않은 무용담으로 날밤 까고. 그러다 기분 상하면 나이를 가리지 않고 군기 잡고. 아무리 황금똥이 나와도 그 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가 않은 게다.

요즘도 친구들은 내가 인정할 수 없는 조언을 한다. 이제 사업도 시작했는데 여기저기 얼굴 내밀며 관계를 좀 만들어 가라고. 하지만 난 어딜 가든 존재하는 그 각반들이 싫고 짜증 나서 손을 내밀지 않는다. 

난 그들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산다. 단지 풍족하지만 않을 뿐. 물질이 너무 풍족하면 정신이 피폐해지고 사람은 물질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사람 같지 않은 짓들을 무단히도 저지르고. 

 잘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각반들을 인정하고 그 밑에서 개처럼 살아라. 그래서 가끔 던져주는 뼈다귀를 모으다 보면 그들만큼 힘도 얻고 삶도 풍족해지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거울을 들여다 보기 바란다. 본인이 얼마나 돼지처럼 흉하게 변해 있는지 알테니까.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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