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길 위에서 묻다

검정 각반들... 4

운산티앤씨 2018. 2. 27.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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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varee - Goodnight Moon (Kill Bill 2 Soundtrack)

내가 소집해제를 한때가 1987년 6월 29일이었을 게다. 웃기지 않는가. 그날이 무슨 날인지는 인터넷을 뒤져 보면 알 게다.

돼먹잖은 보안 교육에 1주일을 참석하고 내일이 그토록 기다렸던 민간인이 되는 날이었는데, 오밤중에 난데없이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쌍칼이라고 불리는 악랄한 작전과장이었다.

'너 이 새끼, 지금이 어떤 시국인데 처자고 있는 거야? 당장 비상 연락망 가동해!'
'나 내일 소집해제요.'
'뭐야? 이 새끼가 영창 가고 싶나?'
'그라등가 말등가. 씨발럼아.'

그리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실 3사 출신 이 양아치와는 악연이 깊었다. 검정 각반들을 조지고 난 후 수차례에 걸쳐 교묘하게 나에게 복수를 했고 매번 당하기만 했던 나로선 유일하게 화풀이 할 기회였는데, 이렇게 무탈하게 잘 살 줄 알았다면 더 심한 욕을 해줄걸.

음 날 가보니 중대장 안색이 별로였다. 하지만 어쩌랴? 난 나가고 상황은 종료되었는데. 그날 난 검정 각반들의 부라리는 눈깔을 뒤로 하며, 후임들의 헹가래 속에 위병소를 나섰다.

잘 있어라, 조까튼 국방색아. 엠병헐 16개월아. 퉤~~~ (빠짐없이 받은 고련 덕에 2개월 먼저 나간 게다. 역시 가방끈은 길고 볼 일이다.)

그 다음날인가, 동기들이 환송식 차 모였다. 당일은 왠지 분위기가 거시기 했거든. 그 자리에서 애들은 날 원망했다. 니가 없는 바람에 쌍칼의 워커 질을 고스란히 당했다고.

정리하자면... 날이 갈수록 거세지는 시위대에 위협을 느낀 정부는 X산 지역에 계엄까지 선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나 대신 후임이 잡혀와 비상 연락망을 돌렸고 집합한 방위병들에게 실탄과 대검을 지급했다나. 그렇게 트럭 위에서 꼬박 밤을 새우고서야 종료가 되었는데. 다음 날이 물태우가 항복했고 내가 깨춤 추며 전역한 날인 게다.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해야 떠꺼머리 대학생들이, 더 이상은 억울해선 못 살겠다고 비무장으로 외치는 곳에 실탄 장전한 총검을 든 군바리들을 풀려고 했다니. 이게 과연 내 나라인지...

이게 뻥이라고? 그날 작전일지와 전역자들 조사하면 다 나온다.

그렇게 힘들게도 빠져나왔건만 내 앞엔 턱도 없는 검정 각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18개월이지만 24개월 짜리들 하고 같이 복학해야 했다. 하지만 난 3학년, 갸들은 2학년이거나 나보다 두어 살 많은데 같은 3학년.

입대 전 같이 뒹굴던 동기들이라 반갑기만 했건만 어느 순간부터 나를 비롯한 방위병 출신들이 따로 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태어나 가장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는 일이 터졌다.

그때 아마 소주 한 병에 500원, 순대 한 접시에 800원 했을 게다. 가난한 지방 유학생들이 돈이 있나. 그저 시장 난전에서 파는, 남이 먹다 남긴 소주가 모여 재탄생한 두꺼비 한 병으로 만족할밖에. 지금이야 알면 술집 문 닫을 일이지만 당시엔 취객이 남긴 술을 모아 한 병으로 다시 제조해서 파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포장마차 아닌가.

어쩌다 보니 방위병 출신들끼리 모였고 우린 즐겁게 마시며 떠들고 있는데 있는데 갑자기 앞쪽이 요란해졌다. 그들은 우리들 동급생으로 검정 각반 반, 국방색 반이 뒤섞여 있었다. 나야 세상 모르니 예전처럼 욕하며 반기는데 옆에 앉은 애들이 갑자기 대가리 숙이고 술만 마시는 게 아닌가. 갑자기 조용해지니 민망한 건 나였다.

'야, 왜 그래? 갑자기 입을 닫고 그냐?

사실 나만 빼고 방위로 간 애들은 나름 출신고에서 공부를 꽤 하던 애들이었다. 하지만 공부만 해서 그런지 모타리가 존만 했고 따라서 심장도 작아 누가 큰소리라도 지르면 화들짝 놀라던 수준이었으니. 반면에 반대편에 앉은 애들은 우리보다 두 어살은 더 먹은 재수생에 덩치도 월등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친구라고 생각한 내가 등신이지.

'어이 똥방우들. 여기가 어디라고 인사도 없이 술을 처 드시나?'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저게 도당최 뭐여.

'야, 니 뭔 소리 하나?'
'아따, 그 방우 새끼 존나 시끄럽네.'

순간 머리를 스쳐간 건 몇 달 전의 그 검정 각반들이었고 지금 내 앞에 앉은 예전 친구들은 더러운 검정색에 물든 한낱 양아치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는데 까진 그리 오랜 시간도 필요 없었다.

'니 방금 뭐라 씨부맀노? 사과해라.'

이미 입학할 때 날 알아 본 몇몇은 어색한 웃음으로 마무리하려 했지만 눈치 없는 두어 놈이 계속 나불댔다.

'와? 방우 보고 방우라 했는데, 머 잘못됐냐?'

순식간에 시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일단 손에 집히는 건 전부 던지고 그대로 떡볶이 밟으며 반대편으로 날아간 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그들을 개 패듯이 밟고 있었다.

'씨발러마, 특공 무술 함해봐라.'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패는 와중에  경찰차가 오고 나서야 개판은 끝이 났다. 지금 같으면 당장 쇠고랑이지만 당시엔 술 마시고 친구끼리 그럴 수도 있지 머, 그런 분위기라 우린 모두 훈방조치되었다.

난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18개월과 24개월, 고작해야 6개월 차이인데 특권의식이라니. 아니면 억울해서인가? 내가 있던 곳의 검정 각반들처럼 지냈다면, 그리고 그들이 우리보다 더 허비한 6개월 동안은 그야말로 하느님처럼 지냈을 텐데. 그리고 나 같은 방위병들 굴려가며 희희낙락했을 텐데, 친구마저 갈라놓은 이 더러운 특권의식은 도대체 누가 준 것인가.

이후 난 이후 틈만 나면 검정 각반들 멱살을 거머쥐었다.

'잇뽕 까서 누가 센지 정하든지, 아이면 갱꼬하고 찌그러지등가 골라라.'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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