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길 위에서 묻다

검정 각반들... 3

운산티앤씨 2018. 2. 26. 19:47

-------

Old Boy OST - The Last Waltz





이놈을 그냥 3기라고 하자. 워낙에 유도 선수 출신에 덩치도 크고 인상도 험악해서 어지간한 담력을 가졌더라도 놈 앞에선 움츠러들기 마련인데 계급이 깡패라고 몇 번 간을 보다 대들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나선, 괭이 발톱만도 못한 깡을 자랑했더라나.

이 대목에서 좀 알아 두셔야 하는 건 특수부대고 뭐고 간에 스트리트 파이팅으로 나서면, 칼 들고 암습하지 않는 한 우위를 점치기 어렵다는 거다. 듣기 좋게 인간변긴지 인간병기인 진 모르겠다만 영화와 현실 정돈 구분할 줄 알아야지 않겠나.

하지만 레슬링이나 유도를 한 사람들은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아무리 빨라도 한 번은 잡히기 마련. 일단 잡히면 더 이상 손발을 못 쓰도록 조르기나 꺾기로 들어가고, 이단으로 그 기술에 걸려들면 어지간해선 빠져나오기 힘들다는 걸 알아 두기 바란다. 그리고 사람 뼈가 쇠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명심하고. 여하튼 그래서 이종 격투기 초반에 이런 유의 운동을 한 이들이 득세를 한 게다.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어느 날 오후, 드디어 일은 터지고 말았다. 둘이 얼굴이 벌게져선 다투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상황이 안 좋겠다 싶어, 난 후임들에게 시설 점검을 가자고 하고선 사무실을 나섰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중대장이나 내가 있으리라 짐작하고 3기의 멱살을 잡고 사무실로 오는 분대장의 발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먼저 피한 게다.

'어잌후... 우리 나가봐야 하는데 기수 선임하고 분대장께서 사무실 쩜 지키셔.'

몇 미터 갔을까 갑자기 사무실 안에서 뭔가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엎어 치기 했구먼. 

몇 주전 훈련장에서 그 녀석이 100킬로가 넘는 거구를 가볍게 집어던지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소린, 그때와 똑같았다. 이후 분대장의 횡포에 대한 민원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서... 하극상이 뭔 자랑이냐고 나무라실지 모르지만, 부당한 폭력의 피해자를 제도권이나 시스템이 구제해 주지 못한다면 정당한 폭력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내 소신이다. 물론 헌병대도 있고, 나도 있고, 중대장도 있다. 하지만 당시로썬 어느 쪽이든 열려 있으되 들어갈 수 없는 문들이었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내건 '구타 근절'이란 구호는 걍 아들 군대에 갖다 바치고 밤마다 가슴 죄는 어미들 듣기 좋으라고 떠드는 개나발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K는 사회에서 용접을 하다 들어온 놈이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병든 부모와 어린 동생을 건사하느라 입대를 해서도 일을 해야 했다. 그 사정을 알고 있었던 난 차마 외면할 수 없었고 중대장에게 보고해서 야간만 근무하도록 했다.   

하지만 가끔 얼굴에 스치는 어두운 표정을 보고 이넘이 밤새 안녕하진 못하겠다 짐작은 했던 터라, 난 가끔 놈이 근무하는 시간을 골라 초소를 급습했다. 검정 각반들도 그런 나를 제지할 순 없었다. 어차피 대대장으로부터 구타 근절을 위한 감시의 명도 받았고 중대장도 뒤에서 봐주는 데다 이미 따끔한 맛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횡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침에 출근을 하니 내무반이 어수선한 게 한눈에도 뭔가가 있었다. 아무리 다그쳐도 놈은 답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동네 조폭 출신을 불러 알아내라고 했더니 보고를 하는데 그냥 넘어가기엔 일이 너무 커졌다.

18개월이다 보니 소집해제 7-8개 월 (정확하진 않다만) 전에 우린 상병 계급장을 달았다. 아마 일반병과 동일한 진급 간격이었는데 검정 각반들은 이걸 몹시 못마땅해 했으니, 툭하면 애들 군복에서 계급장을 찢곤 두들겨 팼다. 그날도 같은 시비였다고 한다. 니가 뭔데 상병이냐, 마이가라 (가짜 계급장) 달고 어디서 똥폼 잡냐 등등 시비를 걸고 원산폭격을 시키다가 급기야 단검을 빼서 목에 갖다 대더란다.

잘못하다간 죽겠다 싶은 데다 워낙 한 성깔 하는 놈의 성정상 도저히 참기 힘들었음은 분명하고, 급기야  공포탄을 장전해서 각반에게 겨눴고, 각반은 그 길로 총도 버리고 도망을 친 게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놈은 아예 착검까지 하고선 온 부대를 휘저으며 각반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산으로 도망간 각반은 철조망의 개구녕을 통해 내무반으로 기어 들어갔고, 거기 내무반장이 알아 버린 게다.

에효.. 가만있을 리 있나. 병장 수명이 방위병 내무반으로 와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놈은 지대로 큰일 났다 싶어 목공소에 숨어 있다 새벽이 되어서야 내무반으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웃기는 건 장교들 중 이 사실을 아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지넘들도 장교들이 아는 순간, 원인 제공자도 무사하진 못할 거란 계산이 깔린 거겠지.

조만간 나를 불러 한 따까리 하겠다 싶어 난 입대 시, 파악해둔 개인사를 근거로 가장 질이 좋지 않은 놈들로만 골라내서 식당 뒷편에 집결시켰다. (그전에 거기에서 대기하란 연통을 받은 게다.)

'내가 다 책임지니까 니들은 그냥 거기 서있기만 해라.'
'우짤라꼬예?' 선배, 그라지 말고 이번에 확 갈아뿌리지예? 영창 그거 한번 갔다 오지 머.'

이미 맡은 피 냄새에 흥분하고 곧 있을 난투극이 줄 짜릿한 쾌감에 이미 놈들 눈에 벌겋게 핏발이 서 있었는데 아차 하는 순간에 누구 하나 죽거나 실려 가거나.

운동복 차림으로 오는 걸 봐선 날 샌드백으로 만드시겠다? 하지만 아무리 개판이라도 갖춘 걸 갖춰야 하는 법, 난 거수경례를 하고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씨발, 언제까지 부대에 있을낀데? 말뚝 박나? 제대 안할끼가?'
'몸 성히 집에 갈 수 있나 함 보자. 내가 먼저 나간데이.'
'확 내장을 꺼내 빨랫줄로 만들었뿔라. 사시미 맛 아직 못 봤제?'

그걸로 상황은 종료되었고 이후 각반들은 방위병 내무반에 얼씬도 하지 않았으며 이유 없이 애들을 괴롭히는 일이 없어졌다.

이게 거짓말 같은가? 아니다. 당시엔 그런 일들이 X산 시내와 근방에 있었던 부대 내에서 다반사로 일어났었고 그로 인해 - 적어도 내가 알기론 - 영창은 항상 만원사례였다.

왜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난폭해지고 잔인해지는가? 왜 지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지지 못하는가? 난 이게 국민성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외국도 바를 바 없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국가의 여러 종족들을 만나 술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직장 생활의 고뇌는 여기나 저기나 마찬가지였다.

난 인간의 깊은 곳엔 그 누구도 없앨 수 없는 잔인성에 기반을 둔 폭력적 기질이 잠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선 앞서 설명한 폭력들을 어찌 설명할 수 있나. 제대로 인사를 해도 내 기분이 엿 같으니, 엄한 이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이고 지가 당했으니 넌 두 배로 맞아 보란 횡포는 도대체 누가 준 권리이고 그런 무례와 인격 침해는 왜 전체의 질서 유지란 미명 하에 용인되고 혹은 장려되었는가?

내가 그렇게 싫었다면 내 대에선 끊어야 마땅하지만 그런 특수한 상황하에선 절대 불가능이다. 내 뒤의 누군가는 똑같은 짓을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런 시스템 자체가 없어지던가 아니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은 국민 개병제를 모병제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한 게다.

사실 요즘 남여간 성의 전쟁도 따지고 보면 군복무로 인한 손실을 국가가 제대로 채워주지 못한 탓도 크다. 시간 나시면 그 더러운 욕설 현장의 시작과 변천을 살펴 보시기 바란다. 남자들이 왜 치사하게 여자들 붙잡고 그 난리를 치는 지를 알 수 있을 게다.

To be continued...









'세상 이야기 > 길 위에서 묻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검정 각반들... 마무리  (0) 2018.02.27
검정 각반들... 4   (0) 2018.02.27
503아.. 세월아, 네월아...  (0) 2018.02.25
나와 우리...   (0) 2018.02.22
다들 늙어갈 텐데...   (0) 2018.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