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Rolling Stones

데쓰 마케팅, 그 본질에 대하여..

운산티앤씨 2018. 12. 29. 14:50




죽음을 인식하고 안하고의 차이는 공포이다. 죽음을 느낄 사이도 없다면 공포도 없고 느낀다면 공포는 필연적이라 하겠다. 사실 동물이 죽음에 임했을 때 인간과 같은 공포를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죽어버린 새끼나 어미, 혹은 동료를 보고 울부짖는 모습을 볼 때 어렴풋이 그들에게도 사고와 기억이라는 우리와 유사한 정신 구조가 존재하나 보다 생각할 뿐이다. (이에 대한 심층 연구자료는 보지 못했으니 잘 아시면 나의 무지를 넓게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이전 글에서 사회의 골격인 각종 프레임들이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막강한 마케팅 수단, 홍보 수단, 세력 결집 수단은 바로 이 데쓰 마케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글에선 단편적인 현상만을 이야기했을 뿐이고 오늘은 보다 깊이 있게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글을 남긴다.

무리를 이루는 집단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현상에 대해 우린 다양한 해석을 붙이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이해는 무리의 형성을 통해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는 것이고 두번 째는 단합되어 강성해진 무력을 바탕으로 먹이를 쉽게 구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나머지 다소 애매하긴 하지만, 동질성을 가진 집단의 유전자의 대이음이며 (즉 번식을 통한 삶의 연속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또는 노동의 효율적인 분배를 통한 고도로 발전된 사회화라고들 하는데, 글쎄 뭔 개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사견임을 전제로, 난 무리 생활을 하는 모든 생물들이 (인간을 포함하여) 뜻하는 바는 죽음으로 부터의 해방과 안도감이라고 본다. 먹이 사슬의 최상위 포식자들의 경우 몇몇 종을 제외하곤 대부분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를 잡아먹을 천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의 공포가 없기 때문에 굳이 무리를 형성할 필요가 없다. 한편 자연은 실로 오묘해서 최상위 포식자들이 지나치게 번성하는 것을 자연적인 출산수의 조절로 생태계가 붕괴되는 걸 막고 있지 않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특이한 것은 무리를 이루면서 언어를 통한 차별화된 사회화를 이루었고 그 결과, 여전히 자연계에선 단일 개체로는 절대 최상위 포식자가 될 수 없음에도, 이 사회란 틀을 통해서 거대한 포식자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이는 어찌보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대단히 위험스러운 집단화이고 실제 이를 통한 폐해는 지구 환경의 파괴라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관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에 대하여 걱정을 하고 지금으로 인해 닥칠 파국을 준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의 요지는 이것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부터의 탈출,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모인 인간들은 머잖아 모두에게 공평한 세상은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안에서 다시 먹이사슬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씨족의 장에서 시작된 이런 계층화는 완력과 영악함을 기반으로 그 수가 많아질 수록 하층부은 비록 굶어죽을지언정 상충부는 언제나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음을 깨닫고 모다 큰 다가리 수를 도모하며 그런 사회 기반의 가장 크고 든든한 들보로 종교를 도입하게 된 것이다. 즉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사후 세계와 연관지어 지킬 수 없는 약속, 그러나 누구도 이행 여부를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개념을 도입하여 무리를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실증이나 증거를 대자면 끝도 없을 터이니 이쯤하고.

하부 프레임들은 어떤가? 만약 당신이 속한 프레임, 즉 조직에서 밀려날 경우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고독, 수치, 빈곤에 대한 공포따위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원래 자연계에서 무리에서 쫓겨난 개체에겐 가혹한 자연의 섭리만 있을 뿐이니, 그 개체에게 유일하게 약속된 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하나의 프레임에서 쫓겨나도 여전히 그 밖을 둘러싸고 있는 프레임들, 대체가능한 프레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죽음의 공포는 앞서 언급한 고독, 수치, 부족함에서 기인하는 심적인 불편함 정도로 착각하는 것이다.

공포가 변질되었다고 본질까지 바뀌진 않는다. 우린 그런 일은 없다고 허세를 부리지만 직장이나 생업에서 밀려날 땐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지 않나. 그리고 그 기분은 항상 죽음과 연관이 되어 있다.

이젠 조금 감이 잡히는가? 데쓰 마케팅은 우리 사회를 지지하는 근욕이고 원동력임을. 그렇다면 이 기법은 전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불수불가결한 조건임은 틀림이 없는데 난 왜 자꾸 이것을 문제라고 하는가.

먼저 글에서 화랑 관창이나 중동지역의 자살 특공대, 그리고 근세사에선 일본의 카미카제, 그리고 한국전 당시 폭탄을 두르고 탱크에 뛰어드는 영웅까지. 한편 IS의 무고한 인명 살상, 특히 참수라든지 지극히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일본이나 미국에서의 사형 집행까지. 이 모든 것이 데쓰 마케팅의 일환이고 넓게 봐서는 현재 벌어지는 각종 분쟁 역시 무리의 단합을 통한 보다 강한 세력화를 구축하는 상충부의 다양한 데쓰 마케팅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인식이고 이해이다.

그러나.

내가 이걸 주창한들 뭐가 달라지는가? 세계 평화를 떠들겠나, 아니면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지금을 질타하며 무두가 깨어나라고 개소리를 짖겠나? 모두 말짱 도루묵의 무의미한 행동이다. 난 다만 이런 이해를 통해 나를 알거나 혹은 잠깐이라도 머물다 가는 이들이 피해를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즉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두가지 의미의 프레임과 상황 인식, 그리고 데쓰 마케팅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궤적에 맞춰 움직일 수만 있다면 그 인생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선동, 프로파간다. 캠페인, 계몽, 각성, 지성인, 행동하는 양심, 애국, 애향, 명예 등등 이름도 잘도 갖다 붙인다 만은 실은 기획자의 양보는 1도 없는, 오로지 타인의 희생만을 전제로 깔고 있는 목적성 데쓰 마케팅이다. 이런 측면에서 난 작금의 일베, 미투, 페미니즘, 그리고 기타 정당들의 음직임들이 심히 불쾌하게 불편하다. 나야 그 사정권 밖의 낭인이지만 내 자식들은 이미 그 사정권 안에 들어 있고 언제든 나의 시선을 벗어나면 그런 협잡성 마케팅의 희생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가. 나의 이런 주장이 궤변이라고 보는가 아니면 일견 타당하다고 보는가? 혹은 나머진 다 버리더라도 1 정도는 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모두 독자의 판단이고 몫이지만 언제나 염두에 둬야 하는 건 생존이다.

위험할 게 어디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당신에게 데쓰 마케팅의 검은 마수가 뻗어 올게다. 그리고 어어 하는 할 틈도 없이 이미 죽음을 직면하고 있고.

부디 새해에는 보다 현명한 삶을 목표하여 타인이나 목적의 희생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뱀발꾸락..

혹시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학교간 대항전이나 지역간 운동경기를 생각해 보라. 왜 내가 여기에 참여해야 하고 왜 내가 상대를 비난해야 하며 심지어는 투석전이나 주먹다짐, 혹은 욕설까지 내뱉게 되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답이 바로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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