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매개로 한 마케팅이란 뜻이다. 난 이 주제에 대하여 어떤 체계적인 연구가 있었나 찾아보았지만 구글에서도 데쓰 마케팅이란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모르지.다른 명칭으로 이미 심도 있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
이는 쉽게 말하자면 특정 집단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대표성을 가진 소수를 죽음으로 내세우는 기법이라고 해석이 되어진다. 근래 들어 이러한 죽음의 마케팅은 전방위로 퍼져 나가고 있는데 단기간 내에 사회 전반에 가해지는 충격의 파급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궁극의 마케팅이요, 도덕적인 면에서 본다면 여하한 이유로도 용납되어서는 안되는 악랄한 모사라고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를 두고 마케팅이라고 표현라는 자체가 어떤 무리에겐 불경스럽다 여겨질지 모르지만 생존을 최우선 조건으로 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행위도,마케팅이란 타인에 대한 어필의 과정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의 기만적인 술수는 근래의 일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적 이념에 의한 순교자, 애국이란 이름 하에 스러져간 수많은 영웅들 역시 넓은 범주에서 본다면 예외일 수가 없지 않은가.
조선 말, 천주교의 예를 들어보자. 왕정을 부정하고 전통적인 유교 윤리도 부정하여 화를 자초했다는 측면이 강한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시 희생된 이들은 성인이라는 이름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호칭은 지극히 상대적이라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당시 그들의 반대 입장에 섰던 주류의 시선에선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불순한 무리로만 비쳤을테니까.
이 대목에서 우린 의문을 가져야 한다. 어차피 종교는 바뀌지 않는 토착 앙 혹은 이념과의 교잡을 피할 수가 없다. 아무리 기독이든 불교든 천주교든 부인을 해도 그 안에는 기복적 토속 신앙이 스며들었고 설사 그 정점에 선 이들이 금기시 한다 해도 개인의 머리 속까지는 통제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시 취할 최선의 방법은 기성세대 혹은 토속 신앙과의 타협이고 시류에의 편승이어야 하니, 결국 그러한 데쓰 마케팅으로 책임져야 할 짐이 많은 이들의 죽음을 초래할 필요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음을 자초하면서까지 사회를 뒤흔들었고 그 결과, 개혁의 바람 속에서 무지몽매한 백성을 계몽하고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는 아이돌과 이이콘으로 거듭 나며 이젠 사회의 주류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무슨 소리인가? 결국 주류에 편입되기 위해 혹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소수를 희생시킨 고도의 마케팅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다.
개인적으론 내가 이 땅에서 한글로 글을 쓰고 말하며 자유로움을 만끽함에 불만이 없으면 늘 행복해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에 대한 존경심도 갖고 있고. 하지만 그 방법적인 측면에선 색다른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윤봉길 의사가 아무런 각성 없이 홍구 공원에 폭탄을 던졌으며 그 잔혹한 고문을 견뎌냈을까.
무언가가 주입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안중근 의사도 마찬가지. 그외 수많은 애국열사들도 이러한 나의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난 그 뒤에 어른거리는 충동의 주체가 보이는데 내가 이상한 건가.
그렇게 열망하는 독립이었다면 사실은 김구가, 그리고 임정의 요인들이 도시락 폭탄을 들고 나섰어야 마땅하지만 이런 저런 사유로 다 빠지고 젊은 애들이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적 권력 투쟁에 돌입했고.
난 설사 이 글로 인해 독립투사 집안의 고소를 받아도 상관이 없다. 왜? 합리적인 의심이고 의견이기 때문이고 이 글 어디에도 의견과 의심만 제기할 뿐 그들을 비난하진 않기 때문이다.
비단 이러한 암묵적인 자살 방조행위가 어디 우리뿐이겠는가? 어제 올린 RATM의 곡 속엔 소신공양하는 베트남 승려의 모습이 보이고 타국의 역사에도 이런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심하다고 여기는 사실은 사무라이의 자살 행위이다.
단지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 아래, 스스럼 없이 배를 가르고 그렇게 아파하는 친구의 목을 두동강 내는 모습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이다. 그러나 그런 자학적이고 마치 사디즘과 매조키즘의 난교를 연상케 하는 행위는 2차 대전 당시, 불퇴전과 전원옥사라는 참극을 빚었고 이는 동시에 일제의 잔혹한 복수적 행위를 가져왔으며 결국에는 원폭이란 최후의 수단을 동원해서야 굴북시킬 수 있었으니. 이젠 이해가 좀 되는가?
반독재에 항거하여 수많은 젊은 영령들이 희생되었고 그러한 희생은 한알의 밀알처럼 뿌리를 내려 오늘의 민주주의를 만든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작고한 김수한 추기경조차 죽음을 조장하는 어둠의 세력들이 민주화 대열에 숨어 있다 질타했지만 유야무야 되었다.
그로 부터 이어지는 희생들. 솔직히 따지면 고 노대통령이나 노의원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해야 하나 확연하게 다른 면은 타인을 희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그간의 데쓰 마케팅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전환적인 의미를 가진다.
즉 소수를 희생하여 다수의 단합을 이끌어내기 어렵다고 판단이 들 땐 수장이 나서야 한다는 교훈을 준셈이니까. 사실 촛볼의 기폭제가 단순히 어린 아이들 죽어가는데도 머리 단장에 바빴던 반대편 수장에 대한 분노였을까.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이쪽의 수장이 뿌린 밀알이 단초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데쓰 마케팅은 열세인 세력들, 비주류인 집단들의 애용하던 방법이었으나 근래에는 주류에서도 차용하는 사례가 눈에 보인다.
사실 기득권 층에선 애초 이런 희생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항상 동작 빠른 기회주의에 시류 영합하는 자들이 전부이기 때문인데, 그런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자들에겐 희생의 강요는 언감생심이고 자칫 반란의 빌미를 주어 왔다.
하지만 그런 주류 가운데서도 상명하복이 굳어진 체제라면 시도할 법도 하다는 것이 나의 지금 생각이다.
문젠 한번 재미를 보면 그칠 수가 없다는 점이고 다음 번엔 보다 큰 충격을 주어야 한다는 압박에 더 큰일을 저지른다는 건데. 글쎄, 그게 뭘까? 궁금해 지고 흥미진진해진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마소. 백가쟁명의 시대에 변방 오디오쟁이가 뭔 의미를 갈까만은 혹여 이 글을 읽은 젊은이들에게 간곡하게 호소하니 어떤 말에도 휘둘리지 말고 항상 자존하고 자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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