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길 위에서 묻다

고목

운산티앤씨 2018. 8. 20. 00:00

---------------


Noir Désir - Le Vent Nous Portera


젊은 날 우리 두 어르신들은 참으로 치열하게 다투시더라. 둘 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한번 시작하면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였지만 일단 그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 기질 그대로 받았는지, 혹은 보고 배워 그런지 몰라도 나도 목소리 하면 한 가닥하고 깨범벅 캔디 닮아 얼굴의 반이 눈이던 마누라도 요즘엔 제법 울대에 힘을 주며 눈알을 부라리는데, 그러면서 개기는 폼이 장닭은 아니더라도 3개월 차 수평아리 정돈되어 보이지만 하여간 내 눈엔 같잖기만 하다. 아후 조걸 걍...콱.. 씨앙.. 눈깔에 먹물을 쪽 빨아벌라.

그렇게 늙어 가시더니 환갑을 지나면서 서로 살기 싫다. 나가라, 돈 내놔라.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시니, 처음엔 큰 아들에게 심판을 봐달랬다가 면박만 당하고 다음은 나에게로. 듣다 듣다 힘에 부치면 나도 꽥 소릴 지르고 전화 끊고, 그러니 이번엔 시집 간 딸래미한테까증. 흐이구...

딸이라고 호락호락 한가? 결국엔 만만한 게 홍어 뭐라고 (특정 지역 비하 아닙니다.) 결국엔 나에게 왔다가 급기야 자식넘들 다 소용없다며 나만 농민의 대표로 빳다 맞거나 똥벼락 뒤집어쓰거나. 나라고 가만있을쏘냐? 엄한 마누라 붙잡고 하소연하니, 이 여자 역시 듣다 듣다 지겨운지 말만 꺼내면 똥 싸러 가네? 그려, 내 말이 똥이다 이거냐?

이제 두 양반 다 여든 줄에 서니 기력도 다하시는지 간만에 방문하면 절간이 따로 없다.

'인자 안 싸우요?'
'이너마야, 싸우긴 멀 싸우노? 밥 묵을 힘도 읎다.'
'아부지는?'
'몰라. 하루 종일 저 방에 누버 구분다. (누워 뒹군다. ㅋ)'

지난 달인가, 난데없이 아부지가 치매에 걸렸다고 난리길래 한달음에 갔다. 흠.. 그 연세에 가끔 보일 수 있는 평범한 행동이란 형의 설명을 듣고 안심은 했다만 어무이는 놀란 가심, 진정이 안되시나 부다.

'야야, 저 영감쟁이 가뜩이나 심장 안조타 카는데 디비 자다가 디지면 우짜노? (여전히 앙금이 남은 멘트렷다? ㅎㅎㅎ)'
'그리 걱정되면 우리 집 근처로 오소. 마누라하고 오메하곤 안 맞으니 같이 살긴 그렇고.'

싫으시다네? 하기사 큰아들 근무처가 바로 코앞이라 무슨 일 생기면 곧바로 최첨단 의료 처치를 남들보다 빨리 받을 수 있지만, 나야 인공호흡을 할 줄 아나. 고작해야 냅다 싣고 그곳으로 가는 수밖에. 그러니 어쨌거나 거기 계셔야지.

흠... 난 고목에 꽃이 핀다길래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린가 했네.

남자 사람, 여자 사람이 만나 일평생 같이 하겠다며 개나 소나, 게나 고둥이나 만장하신 하객들 앞에서 약속하지만 그 맹세 어디 잘 지키겠더냐? 어느 한쪽 나자빠질 때까증 헤어지지 않으면 다행인 요즘 세상이다 보니 두 양반 지금 모습에서 고목에 핀 꽃이 보인다.

그게 우찌 우리가 생각하는, 니들이 죽고 못 사는 염병할 사랑이겠나. 그리도 같이 오래 살다 보니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니 어찌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달리 정이라고도 한다더라 만은 사실 난 이 단어 별로다. 왜냐고? 왜긴, 육정, 떡정 고기 냄새나서 실타. ㅋ

그려, 그건 고따위 연체동물 수준의 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쵝오의 사람 사이 아닌가. 아무런 대화가 없어도, 함께 함만으로도 힘이 되는 관계.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인간 관계에서 그런 모습을 보았던가?

구랴, 정작 흐드러지게 핀 꽃에선 그다지 느낌도 없더라만은 어쩌다 다 썩어빠진 나무 귀퉁이에 핀 꽃은 왜 그리 곱고 귀하게 느껴지는지 이제 알겠구마이.

어제 우리 동네에서 어떤 남정네가 마눌이 다른 남자와 살겠다 선언했다 해서 온몸에 신나를 붙이고 자결을 했다나? 사정이야 모르겠다만 그리도 분할까. 그 나이면 너나 나나 남자 친구, 여자 친구 하나 정돈 눈감아 줘도 될법한데 그리도 분한가 싶다.

뭐..니눔 일 아니니 쉽게 말한다 할지 모르지만 이쯤 되면 누구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나의 것인 줄 알았던 모든 것이 모래처럼 내 손아귀에서 스르르 빠져나감을 느낄지니, 니도 그 나이 되어 봐라, 쉽샤키들아.

앞뒤 구분조차 못할 영원의 시간 속에 한 점 먼지처럼 떠올랐다가 흔적도 없이 가뭇 사라지는 게 너의 삶이고 나의 인생이다. 사는 동안 치열했고 최선을 다했으면 그만, 더 이상은 추하디 추한 노욕에 지나지 않음을 몇 번이고 이야기해야 알아들으려나.

그 끝자락에서나마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고, 비록 힘은 없어도, 마음의 끈이 다시 이어지는 모습이야말로 즉빵 고목의 꽃이 아니겠나.

특별한 거 없다. 존나게, 열나게 달려가는 그 끝은 우리네 인생의 종 치는 날인데 허구헌날 못 잡아먹어 으르릉 대는 꼬락서니가 다 가엽고 안타깝기만 하다.

고목의 꽃이 뭔지 알고 싶은가? 그건 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나타날 것이며 그 순간이 바로 너의 마지막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다들 올땐 좋아서 울고, 갈 땐 슬퍼서 울며 간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