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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염천에 이 글을 끝까지 화를 내지 않고 읽어낸다면 당신은 뭐를 해도 성공할 겁니다.
전투는 전쟁의 하위 개념이고 전술 역시 전략의 하위 개념입니다. 그리고 최상층부엔 명분이 있기 마련이고. 명분은 국어에서는 이리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명분: 각각의 이름이나 신분에 따라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군신, 부자, 부부 등 구별된 사이에 서로가 지켜야 할 도덕상의 일을 이른다.
그러나 영어에서의 정의는 조금 다릅니다.
명분: Justtification. 즉 정당화.
즉 동양의 명분은 유교에 근거한 인륜, 천륜과 같은 도덕적인 율법의 준수 여부이고 여기엔 신분과 계층이란 고착된 개념이 숨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명분은 정당화, 그러니까 그 시점에서 취한 행동의 이유만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면 허용이 된다는 약간의 유동적인 개념입니다.
** 한편 이 생각들은 현재도 유효해 보입니다. 트럼프의 막가파식 행동과 모 공무원의 개. 돼지 발언을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양에선 다소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지금으론 이해할 수 없는 대의명분으로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켰고, 서양 역시 지금으론 용서될 수 없는 이유로 무자비한 참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명분은 이 둘의 짬뽕이고, 하이브리드이며 교집합이자 야합의 산물입니다.
영상은 무협 영화사상 가장 아름답게 촬영된 것으로 평을 받고 있는 이연걸 (무명/無名)과 견자단 (은모장천/銀毛長天??)의 결투 장면입니다. 대부분의 장면은 상상 속의 결투, 무협에서 말하는 논검입니다. 그러나 말이 아닌, 정적 속에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마음 속으로 상대의 초식을 예상하고 반응하니 엄밀하게 보자면 논검과는 다른 차원의 결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모든 초식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이미 둘 다 대응 방법을 다 찾았으니까요. 결국 최후의 일격만 날리죠.
전략과 달리 전투는 다소 더티한 면모를 보입니다. 전략에선 때론 더 큰 이익을 위해 일부를 포기하는 경우도 생기지만 전투에선 이기지 못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 무슨 수를 써서든 이겨야 합니다. 흔히 나의 어깨를 내주고 적의 목을 친다고 하는데 이는 일본 전국시대 미야모토 무사시의 전투 각론에서 나온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최악은 역시 승자가 없는 전쟁이고 전투입니다. 어느 쪽이든 물러서면 둘 다 가혹한 희생을 치를 필요까진 없지만 그렇게 신사적으로 치른 전쟁과 전투는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무협에서 동귀어진식의 공격법이라고 하고 그 결과를 동패구상 혹은 양패구상이라 합니다. 그리고 동귀어진은 소위 말하는 2차 대전 당시 일본제국군의 자살특공대, 가미카제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어렵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이 모든 복잡한 논리를 한방에 박살 내는 우리 말이 있으니 그게 바로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그리고 여기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골로 갈지언정 니 얼굴에 생채기는 남겨주마.
니 혼자 잘 사는 꼴은 죽어도 못 봐.
사촌이 논 사면 배가 아파
등과 같은 우리 고유의 알흠다운 정서가 녹아있습죠.
그러나 전략의 명분은 고사하고 전투의 승패를 떠난, 그리고 하찮은 무협의 호승지심 생사결 축에도 끼지 못할, 단순 분노에서 기인한 동귀어진식 공격법을 우린 일상생활에서 너무도 공공연하게, 자주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중엔 동패구상까진 아니더라도 어깨를 내주고 목을 친다는 셈법을 감안한 행동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동패구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다른 동물보다 나은 이유로 툭하면 들먹이는 합리적인 이성, 이해득실을 정확히 셈은 도대체 어디로 실종되고 그럴까요? 바로 분노 때문입니다. 그리고 즉흥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정의 표출로 미화하고 은연중 장려했기 때문입니다. 즉 즉흥적인 분노의 발산은 감정 표현의 방법 중 하나이다.
우린 이런 소릴 자주 합니다. 화가 나면 그럴 수 있지. 그래서 먼저 때려서 사람을 죽인 일도 이해는 한다고 하죠. 벌거벗고 다니니 강간 당해도 싸다고 뒤에서 손가락질합니다. 대가리가 나쁘니 사기당하는 당연함이고. 즉 나도 장차 어찌 될지 모르니 미리 연막을 치는 거죠. 이건 유아교육이 엄청나게 잘못되었다는 반증이고 가정 교육부터, 즉 백골들의 잘못된 사상에 여잔히 현세가 오염이 되어 있다는 거증입니다.
사회가 그 모양인데, 나만 백두산 생수냐? 너도 그러고 다니니 나도 살짜쿵 한다 해서 문제냐? 아닙니다. 아직도 이해를 못 하신다면, 한번 저질러 보고 그 결과를 겪어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똥을 찍어 먹어 봐야 똥인 줄 아는 건 아니죠?
다들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고 하는데 병이 낫지, 개죽음이 좋은가요? 상대를 피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콩밥 몇 년 먹다 나오면 내 세상이 되던가요?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사셔야 하고요. 잠깐 수모 때문에 인생 항로가 바뀌지 않아요. 도로에서 운전 제대로 못해 십 원짜리 소릴 들었다고 일일이 차 세우고 나도 한 성깔 한다고 보여주면? 뭐가 크게 달라집니까? 훗날 그 자식이 내 목줄을 잡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나 그나마 이런 분노 표출은 자의입니다. 스스로 결정했으니 응당 결과를 감수할 준비는 되어 있지요. 하지만 주변의 충동질이나 계략에 의해 판단 착오에 바탕한 행동이라면? 그야말로 참극이고 비극입니다. 동귀어진도 아니고 그냥 자살입니다.
이런 유의 공격법은 남자보단 여자가 더 심합니다. 물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범죄는 남자가 많지만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짓은 여자가 더 심합니다.
남자, 바람피웁니다. 술에 취했건, 작정을 했건. 그러나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참신하고 이쁘고, 젊은 여자라 해도 집에 도사리고 있는 여편네와 다를 바 없음을 시나브로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여자들은 참지를 않습니다. 일단 터뜨려 놓고 보자 식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본인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성들께서 뭐 이따위야 해도 할 수 없습니다. 혹시 본인들 경험을 돌이켜 보시지요. 얻은 게 뭐가 있나? 경제적 어려움, 가중된 양육의 고통, 외로움, 가족으로부터의 소외됨,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렇게 해도 분이 풀리지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2천녀 전, 사막의 건달께선 원수를 사랑하라고 나불댔을까요?
반면, 남자도 이걸 피한다고 해서 무사할까요? 바람피운 상대도 여자입니다. 컨트롤할 수도 없는 상대들입니다. 그런 여자들이 분노로 저지르는 일들의 결과는 잘 아실 겁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수습은 되죠. 상처는 남지만.
하지만 여기에 계략과 충동질이 개입되면 사태는 걷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철저한 파괴와 그에 따른 폐허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제, 오늘 우린 이 두 전형을 잘 구경했습니다. 하난 계략의 냄새가 지극히 풍기고 또 하난 분노가 그 원인으로 보입니다. 전자는 상처는 입었지만 회복 가능하며 집안도 다시 자릴 잡을 겁니다. 그러나 후자는 1차 대전 후, 2차 대전이 남은 꼴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사자인 여자 둘은 아마 파국적 결말을 맞을 겁니다.
쓰고 보니 말도 드럽게 많고 기네. ㅎ
하지만 남자들은 반드시 명심하고 살아야 합니다. 여자,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함부로 대해선 더더욱 안되고. 오죽하면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린다 했을까. 모 신문사 사주 넘은 이제 망자의 혼령에 죽을 때까지 시달릴 겁니다.
섹스? 그거 별거 아닙니다. 가성비로 따지면 촤악입니다. 영어론 마스터베이션이라고 하죠. 다음은 네이버 지식 백과의 인용입니다.
- 인용 시작 -
유다의 아들인 엘과 오난이 있는데 엘이 젊어서 죽자 하나님이 오난에게 명하여 엘의 아내 즉, 오난에게는 형수가 되는 다말과 관계를 맺어 자식을 보라고 명한다. 당시 유대의 율법에서는 형제가 죽으면 죽은 형제를 대신해 다른 형제가 아이를 잉태시키게 돼 있었다.
우리 역사에도(고구려 시절) '형사취수제' 같은 제도가 있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 낯선 제도는 아니다. 문제는 이때 오난이 자기 아들이 될 것도 아닌데 형수에게 자기 '씨'를 주는 것이 억울했던 모양이다.
오난은 질외 사정을 하고 이 모습을 본 하느님이 분노해 오난을 죽인다. 자위를 뜻하는 여러 단어들, 그러니까 마스터베이션(masturbation), 셀프 폴루션(self-pollution), 셀프 어뷰즈(self-abuse), 오나니(onanie) 등 그중에서 오나니의 어원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소중한 씨를 땅에 쏟은 오난은 인류 역사 이래로 가장 수치스러운 이름 중 하나가 됐다. (자신의 이름이 자위행위의 어원이 됐으니).
참고로 마스터베이션의 어원은 라틴어 마수투베어(masturbare)에서 유래했는데 '손으로 더럽히다'라는 뜻이다. 자위는 예전부터 안 좋은 것으로 규정지어졌던 것이다. 심지어 병 취급을 받았다. 자위행위가 곧 병이라는 논리가 진실로 굳어져 버린 유럽! 이렇게 되자 유럽의 의사들은 자위행위에 대한 치료법에 골몰하게 된다.
수많은 자위행위 예방약과 치료약이 등장하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위행위 치료사에 획을 긋는 인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스위스의 의사 티소였다.
티소는 1758년 〈오나니즘(Onanism)〉이라는 책을 내놓는다. 그 이전에 작자 불명의 〈오나니아(Onania)〉라는 책이 나오기는 했지만, 현직 의사가 자위와의 전쟁을 위해 본격적으로 덤벼든 〈오나니즘〉의 무게에 비하면 중량감이 떨어졌다. 당시 티소의 〈오나니즘〉에는 과도한 자위행위로 사망에까지 이른 이들의 증상과 투병 기록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
10세 전후 아이들, 특히 16세 정도의 아이들이 과도한 자위를 할 경우에는 등뼈가 차츰 구부러져서 구루병 환자처럼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이 끼친 영향은 상당했다. 자위가 곧 병이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이 이제는 학문적으로 객관화된 진실이 된 것이다. 〈오나니즘〉은 그렇게 18세기 유럽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또한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번역돼 퍼졌고 사회 저명인사들, 오피니언 리더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 인용 끝 -
하지만 내 견해는 다릅니다. 자위 (自慰) 행위는 소극적인 방어의 개념인 자위 (自衛) 행위로 바뀌어야 하며 Masturbation은 Masterbation. 베이션은 방출하다란 뜻입니다. 즉 스스로 뭔가를 쏟아내는 행위죠. 즉 거장이 되다, 달인이 되다 와 일맥상통합니다. Masterization...
예전에야 섹스를 더럽다 여겼고 아직도 우린 그리도 감추고 싶어 하는 치부입니다. 사회 분위기를 바꿀 순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안식과 평안을 찾아야 한다면 적극적으로 권장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성비 면에서 보죠. 어떤 완장 두목넘은 그거 한번 쏟아내자고 기백 쓰고 조만간 콩밥 먹게 생겼습니다. 모 정치인은 그거 한번 쏟아내자고 한평생 이룬 금자탑을 한방에 홍콩보냈습니다. 이건 가성비 차원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도라이 아니고서야...
오늘 무죄, 비록 1심이지만, 받은 남자에게 감히 묻노니... 그렇게 가슴 졸이며 근육 한 줄 오르지 않는 무가치 노동인 정사 (情事)보단, 심플하고 간결하게 휴지 하나로 해결하고 정사 (政事)에 몰두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뭐가 그리 좋다구 싫다는 어린애에게 질알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완장 두목... 이젠 진짜 좃됐다란 말이 뭔지 실감하실 텐데, 걍 심플하게 휴지 한 장으로 끝내도 될 일에 뭐 하러 기백 쓰고 이 지경인감?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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