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 ‘리얼’이 세간의 혹평을 받은 것을 계기로, 영화 애호가들의 입에 다시금 오르내리는 이름이 있다. 지난 2004년 개봉한 한국 영화 ‘클레멘타인’이다.
2004년 개봉한 한국 영화 '클레멘타인' 포스터./인터넷 캡쳐
개봉한 지 10년도 더 된 영화가 왜 새삼 이 시점에 거론되고 있는지, 이유를 알아보기로 하자. 스포일러가 약간 있으니 미리 용서를 구한다.
#전설의 망작
영화 클레멘타인은 납치당한 딸을 구하기 위해 한 판 대결을 벌이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제목 유래는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엔 번안(飜案) 때문에 클레멘타인이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가버린 노래로 알려졌지만, 실은 미국 ‘골드 러시’ 시대에 금맥 탐색에 미쳐 있던 아버지가 딸 클레멘타인을 사고로 잃고서 그리워하는 게 원내용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이라는 정서 때문에 이 노래를 영화 제목으로 뽑은 듯하다.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의 원래 가사./인터넷 캡쳐
이 영화 최종 보스는 ‘잭 밀러’로, 유명 액션배우 스티븐 시걸이 배역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더해봐야 1분 남짓이다. 섭외비를 100억원에서 12억원으로 깎은 대신, 출연 시간도 비례해 덜어냈기 때문이다. 참고로 ‘클레멘타인’ 총 제작비가 약 30억원이었다. 상영시간 100분짜리 영화에서, 단 1분에 제작비 3분의 1 이상을 털어 넣은 것이다.
지난 2005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한국영화연감’에 따르면, 2003~2004년 한국영화 평균 총 제작비는 약 41억6000만원이었다. 사실상 18억원으로 만든 ‘클레멘타인’은 동시대 한국 영화에 비교해도 수준이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클레멘타인’을 보면 등장인물 앞니가 재생과 소멸을 반복하는 등, 품질 관리가 전혀 안 된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 '클레멘타인' 중 일부 장면. 여자 아역배우의 앞니가 사라졌다가(위 사진) 다시 나타나는 장면이 다수 있다. 배우가 유치에서 영구치가 나던 시기여서 앞니가 없었고, 이를 가리려 가짜 이를 넣었지만 일부 장면에서 실수로 빼먹은 것으로 보인다./인터넷 캡쳐
영상미가 떨어지면 시나리오로 승부를 봐야 한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의 진짜 문제는 되려 시나리오와 연출에 있었다.
줄거리를 간단히 보자. 불법 격투장 파이터인 김승현(이동준 분)은 전직 세계 태권도 챔피언이다. 하지만 대회에서 심판 편파판정으로 잭 밀러(스티븐 시걸 분)에게 금메달을 뺏기고 슬럼프에 빠져 불법 격투계에 발을 들였다. 격투도박사인 토마스(케빈 그레비스 분)는 흥행을 목적으로 김승현과 잭 밀러의 격투장 재대결을 권하지만, 김승현이 거절한다. 그러자 토마스는 김승현의 딸인 사랑이(은서우 분)를 납치해 협박하며 재대결을 강제로 성사시킨다. 그리고 딸을 지키기 위한 아빠의 사투가 시작된다.
현실로 치면 메이웨더와 파퀴아오를 싸움 붙이려 파퀴아오 딸을 납치한 셈이다. 이게 말이 되는지를 따지다 보면, 결국엔 이 영화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야 하니, 이 부분은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영화에서 김승현은 태권도를 접은 뒤 강력계 형사가 된다. 현실에도 무도 특채 제도가 있으니 여기까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임무 수행 중 무예를 발휘해 조직폭력단을 박살 냈다가, 손해배상 문제로 빚을 지고 불법 격투계에 뛰어드는 건 영 매끄럽지 못하다. 게다가 이 석연찮은 전개가 영화 분량까지 상당히 잡아먹는다. 차라리 주인공이 애당초 불법 격투선수였던 게 깔끔할 뻔했다.
태권왕의 여자친구는 검사 임민서(김혜리 분)였다. 둘 사이엔 아이가 있었지만, 딸을 미혼모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임민서의 어머니가 손을 써 손녀를 보육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딸에겐 사산(死産)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임민서는 확인 한번 없이, 자식이 죽어서 태어났다는 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렇잖아도 사족(蛇足)이 많은 영화인데, 그나마 납득이 가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
연출도 기괴해서 카메라가 이상한 곳으로 튀거나 배경음악에 인물 목소리가 덮이는 경우가 적잖다. 그나마 배경음악도 장면과 어울리지 않는 때가 잦다. 물론 영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서 사람 머리가 터져나가는 장면에 에드워드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쓴 사례처럼, 일부러 영상과 음악을 어긋나게 배치하는 영화 기법도 있긴 있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을 본 관객 대부분은, 소싸움 배경으로 발라드를 넣은 건 영 아니라는 의견을 냈다.
그렇다고 배우들 연기가 썩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가장 몸값이 비싼 배우인 스티븐 시걸은 영화에서 표정 한 번 제대로 바꾼 적이 없다. 대사도 열 마디가 채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평론가들은 ‘클레멘타인’에서 스티븐 시걸보다 연기를 잘한 배우가 몇 없었다고 평했다.
이처럼 총체적 난국이다 보니 흥행 실패를 피할 수 없었다. ‘클레멘타인’ 전국 관객 수는 6만7000여명이었다. 정확한 매출액은 알 수 없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한 건 확실하다.
#눈물의 똥꼬쇼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망한 영화는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은 되려 영화가 망하고 나서 벌어진 일 때문에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인터넷 캡쳐
가장 유명한 건 눈물의 똥꼬쇼 사건이다. ‘클레멘타인’ 주연 이동준은 이 영화에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까지 총 52억을 털어 넣었다가 큰 빚을 지게 됐고, 한동안 밤무대를 전전하며 돈을 벌게 된다. 사진의 현수막은 그 당시 제작됐던 물건이다.
사실 이동준은 똥꼬쇼와 무관하다. 환상의 똥꼬쇼는 다른 사람이 벌이는 거고, 이동준은 깊은유혹의 꽃미남일 뿐이다. 하지만 사진에야 그런 설명이 따로 없다 보니, 깊은유혹의 꽃미남이 환상의 똥꼬쇼를 벌이게 한 영화는 대체 뭘까 하는 호기심을 일게 했다. 결국 여러 사람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클레멘타인’에 손을 댔고, 여기서 이 영화를 한층 더 유명해지게 한 명언이 나온다.
영화 '클레멘타인'에 달린 평가들./인터넷 캡쳐
바로 ‘이 영화를 보고 암이 나았다’는 평이다. 다른 댓글을 보고 추정해 보건대, 이 영화를 보고 암세포가 암에 걸려 죽어 암이 나았다는 의미인 듯하다. 지금이야 암환자와 그 가족분들께 실례된다 해서 잘 쓰지 않는 분위기지만, 당시엔 상당히 화제가 된 표현이었다. 아무튼 이 표현이 유명해진 덕에 ‘클레멘타인’ 역시 망한 영화의 대명사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영화 ‘리얼’이 흥행 참패 위기에 놓이자 별 연관 없어 보이는 ‘클레멘타인’이 흔히 거론된 게 이 때문이다. 누군가가 영화를 ‘클레멘타인 급’ 혹은 ‘클레멘타인보다 못한…’이라 평한다면, 그는 해당 영화를 회생불능으로 여기고 있다 간주해도 무방하다.
#여담
일전에 ‘<디테일추적> '어쌔신 크리드'에게는 왜 '암살닦이'란 이름이붙었나’ 기사에서 언급했듯, 요즘엔 흔히 망가져서 유명해진 영화에 ‘닦이’ 표현이 붙는다. ‘클레멘타인’은 반지닦이보다 한참 앞서 나온 영화지만, 워낙 망한 걸 로 유명한 영화여서 뒤늦게나마 ‘닦이’ 명칭이 붙었다.
클레멘타인을 본 이에게 명대사를 꼽으라면 열에 아홉은 “아빠! 일어나!!”를 택한다. 링 위에서 잭 밀러에게 처참히 폭행당하던 김승현에게 힘을 불어넣은, 김사랑의 응원 메시지다. 때문에 일부 팬은 이 대사를 빌어 ‘클레멘타인’을 아빠닦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 널리 쓰이지는 않는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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