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즐거운 하루

I have lived in China Chapter 2-2

운산티앤씨 2018. 6. 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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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ianist, Nocturne C Sharp Minor Chopin.


啊呀.。。。

요거이 뭔 소리인가 하면 '아이야'로 발음되고 우리로 치자면 '아이고~' 혹은 '아놔..', 또는 '어휴' 정도되는 감탄사입니다. 이건 이따 이야기 하기로 하고...

물경 14시간 이상을 길에서 보내다 보니 마치 하선한 양 땅울림증이 생깁디다. 이건 또 뭐냐? 장시간 배를 타다가 땅을 디디면 마치 물처럼 출렁거리는데서 연유한 착각 증상이고 배멀미와 비슷하지요.

여하튼 다음 날 12시가 되어도 일어나질 못할 정도로 탈진, 애들은 유치원 간다고 난리고 아이 (중국 아지메)까지 와서 뭘 만드느라 부엌에서 마눌과 토탁토닥, 웨이 녀석은 뭔 질알로 아침부터 와서 전화기 잡고 시시덕.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요. 하는 수 없이 전기 자전거를 몰고 호수 방향을 내달렸습니다. 일전 한 번 이야기한 바 있지만 그때 당시 내가 몰던 전기 자전거는 딱 우리네 철가방 오토바이 사이즈였습니다. 꽤 럭셔리했습죠. 1회 완충에 8시간이고 최고 시속 45킬로, 35킬로 정도로 달리면 최장 80킬로가 가능했습니다. 배터리 내구성까진 따져보진 않았지만 보통 1년 정도 쓴다했는데 가격 대비 아주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아마 25만 원 정도였을 겁니다.

우린 어디까지 와 있나요? 난 가끔 이유도 없이 중국을 적대시하며 하찮게 여기는 이들을 보면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모화사상에 젖어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 역사에 기여한 종이, 화약, 활자, 인쇄술등 그들의 4대 발명품을 생각해 보면 함부로 대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지금은...

당시 소주 시내는 한참 외자 유치 바람이 불어서 여기 저기 공사판에 하루가 다르게 신축건물들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도 아파트나 다리 같은 곳에 멋진 조명을 설치하던데 사실 귀국 직후엔 볼 수 없던 현상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원래 있던 고풍스런 조경에 갖가지 조명을 덧붙여 한번 오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도시를 치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워낙 땅이 남아 도니 도로도 넓은데다 직선으로 쭉 뻗어 자전거로 질주하기엔 안성맞춤. 헬멧은 쓰지 않습니다. 비올 때만 씁니다. ㅡㅡ;; 정말 그땔 생각해 보면 죽으려고 작정했는지.

그렇게 호수 주변을 돌다가 잠시 멈춰서서 오가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유체이탈하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어차피 내가 죽을 수는 없는 타지이고 외지인이라 그들 삶에 가까이 가질 못하니 늘 주변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한편으론 편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쓸쓸하지요. 그렇게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그 앞에 출렁이는 물결이나 강,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시간이 내 앞을 흘러가는 것 같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오전을 다 보내고 돌아오는 길, 사거리에 잠깐 정차해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직진을 무시하고 난데 없이 거대한 트럭이 죄회전을 하지 않겠습니까? 저게 뭐여 하기도 전에 검은색 승합차가 돌진하다가 급히 왼쪽으로 핸들을 꺽었는데 멈추질 않고 그대로 내 앞으로 날라 오질 않겠습니까? 어어 하는 것도 일순간 코 앞으로 거대한 승합차가 돌진해오고 난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다행히도 차는 1미터 전방에서 간신히 옆으로 멈춰섰고 난 이윽고 벌어질 난투극을 상상했는데, 글씨, 승합차 운전사 왈...

啊呀.。。。

그리고 상대편도 啊呀.。。。그러고선 가버리더라고요. 다친 사람 없으니 다툰들 뭐하리. 그리고 욕해서 이긴들 뭐하리. 니나노판입니다. 참고로 당시 중국에선 차로 사람을 치어 죽이더라도 2만 위엔이면 합의 종료입니다.  요즘 환율로 300만 원 조금 넘는군요. 우리보다 못한 곳엘 가면 분명히 누리지 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저렴한 물가와 인건비, 우리로썬 꿈도 못꿀 황제같은 삶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에 비례헤서 당신의 목숨값도 개값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은 마냥 좋기만 하나 봅니다. 큰 놈은 이제 거의 막힘없이 중국어를 하고 작은 애는 더듬거리긴 하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습니다. 마누라는 죽어라 중국어만 파더니 결국엔 혼자 장을 보는 수준까지. 웨이넘과 영어로 나불 거린 나만 중국어 잼병. 후일 친하게 지내던 대만인 하나가 와서 웨이란 놈을 무섭게 혼을 내더군요. 미스터 00이 왜 아직 중국어가 저 수준 밖에 되지 않느냐고. 이게 다 니가 영어 공부하려고 부린 수작아니냐고 불같이 화를 내더군요. 흠.. 생각해 보면 대만인이 본토인들보단 정도 많고 의리나 의협심이 강했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애들을 데리러 다시 전기차를 끌고 나갔네요. 두 녀석을 뒤에 태우고 나오는 순간 뭔가 획.... 어린 커플이었는데 자전거 위에서 노가리 풀다가 우릴 못봤나 봅니다. 대략 이 정도면 그쪽에서 사과를 해야 하는데 이넘들은 멀리서 뭐라 떠들며 웃네요?

'아빠, 저새끼들이 아빠 비웃는다.'
'뭐시라, 이러 개 ㅆㅂ ㄱ ㅈ가튼 %%&&@@#$%%'
'아빠, 한국말로 욕하면 뭐해? 어, 이제 아빠 보고 욕한다.'

나참, 애들 태우고 가서 욕하고 싸워봤자 득될 건 하나 없고 참자니 붙통 터져 오르고. 하지만 말입니다. 이후부턴 좋은 버릇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건 화는 나중에, 논리적으로 따질 건 차분하게. 그리고 기선을 잡은 뒤 화를 내야하다는 거죠. 그래야 상대가 누구든 꼼짝달싹 못하게 엮을 수가 있단 사실을 그 나이가 되어서야 깨달았습니다.

중국말은 성인 남자나 나이든 여자들이 하면 매우 시끄러운 노이즈 수준입니다만 젊고 이쁜 츠차가 조용하게, 그리고 아이들이 나불대면 대단히 귀엽게 느껴집니다. 아들넘은 시끄럽긴 하지만 그 작은 주뎅이로 나불대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할까, 그리고 양쪽으로 머릴 올려 이미 중국 애가 되어버린 딸은 뭔소릴해도 이쁘고 귀여웠습니다. 이젠 둘다 나보다 더 커져 징그럽지만 말입니다.

우리 애들 입니다. 이 사진을 올려도 무방한 건 지금과 비교해선 도저히 상상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즉 누군지 모른다 이거죠. ㅎㅎㅎ




난 지금도 돌아온 걸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두었다면 분명히 적응 잘하고 지금보다 더 좋은 삶과 희망을 가졌을텐데. 지금은 그저 그런 촌동네 애들이고 인서울 대학을 가느냐 못가느냐 따위 걱정을 해야 하다니.

선장을 잘 만나야 합니다. 누가 어떤 실수를 했건, 조타를 누가 했건 최종 결정과 관리 그리고 감독은 고스란히 선장의 몫입니다. 따라서 배가 침몰할 땐 나머진 다 탈출하더라도 선장은 끝까지, 때론 같이 수몰되어야 하는 거죠.

내가 끌고 가는 방향이 맞나 뒤돌아 보십시오. 고집 앞세우고 자존심 지키자고 따르는 무리를 죽음의 낭떠러지로 끌고 가지 않나, 매번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가장의 가장 큰 책임입니다.

그런 면에서 난 항로 이탈을 많이 한 수준 이하의 머구리배 선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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