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룡이 사라진 이유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세는 혜성 혹은 운석의 충돌과 이후 이어진 빙하기입니다.
운석이야 아닌 말로 날라오던 돌에 맞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빙하기는 환경의 변화라고 봐야겠지요. 결국 환경을 극복하고 적응한 포유류의 세상이 도래 했으니까.
요즘 세상이 뒤집어 지려니 그동안 득세하던 정당 하나가 마치 그 공룡처럼 마지막 몸부림을 처절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오늘은 정치 이야기가 아닙니다.
댓글을 다는 이들이나 이제 막 등을 돌리기 시작하는 식자층들이 첫번 째 이유로 꼽는건 난국을 타개할 대안이 없다, 두번 째는 바뀌고 있는 시류를 모르고 식상한 캠페인으로 일관한다는 점입니다.
한참 잘나가던 배우나, 탤런트, 개그맨이 어느 날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다가 희안한 몰골의 낭인으로 혹은 변사체로 발견되어 충격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비단 유명인이나 정치인들에게만 그럴까요?
내가 다니던 회사의 동기 하나도 사라진지 몇년 후 서울역 노숙자들 사이에서 보인 적도 있습니다. 수많은 퇴직자들이 양산되지만 재취업이나 다른 사업을 통해 성공하는 케이스는 전체의 5%가 채 되지 않을 겁니다. 겨우 먹고 사는 정도.
OECD 국가 중 자살율이 최고를 달려 창피하지만, 그만큼 살벌한 경쟁을 견디지 못하고 탈락하는 이가 많기 때문이라고 봐야 하겠지요. 지금의 우린 아주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과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선진했던 나라들이 겪었던 갈등과 극심한 경쟁의 파도는 안전장치 미비한 우리 사회 전반을 덮치고 있으니 더 많은 부적응자들의 출현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바뀐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함을,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자들은 그런 처지에 빠진 자들의 인과응보라 쉽게들 말하지만, 글쎄요. 그게 그리; 쉽게 단정 지을 일인가요?
다시 공룡의 예를 들어보면 지나치게 거대해진 덩치때문에 잽싸게 도망을 못갔고, 추위가 닥치는데도 체온을 보호할 만한 털이 없었다, 풀만 먹던 초식공룡들이 추위에 굶어죽자 육식을 하던 포식자들도 덩달아 사라졌다.
뼈다귀 뒤져 추론하고 이리 끼우고 저리 끼우고 해서 추론은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공룡들의 자리에 우릴 대입시켜 보면요?
손오공도 아니고, 덩치야 작아져라 하면 작아지나요? 털아, 자라 거라하면 쑥쑥 솟아올라 북극곰의 털코트를 만들어 주나요? 생체적인 변화를 어찌 단시간에 바꿀 수 있냐, 하지만 생각은 하기 나름이고 노력하면 안될 게 뭐있어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 생각은 수십년 세월 속에 바위보다 단단하니 어쩌면 덩치를 줄이는 것만큼 어려울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4차 혁명까지 우린 4번의 격변기를 거쳤는데도 이젠 좀 적응 잘 할까 싶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요는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바꿀 수 있다고 강여기고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분위기입니다.
살아온 세월 속에서 배운게 하나 있다면 사람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번 각인된 생각과 주어진 프레임 안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는 거죠. 우린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채, 사멸해가는 이웃을 보고 있고 그 안에서 나의 모습을 부단히 찾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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