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은 주막집이나 마찬가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얼굴이 들어오고 나가고. 1주일 정도 머물면서 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진즉 눈치챘지만 만만찮은 동네임을,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인과 조선족을 믿지 말라는 것. 그리고 아무 데서나 나대지 말 것 등등.
그중 가장 고약한 건 조선족을 조심하란 경고였다. 같은 동포끼리 왜 그래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우리와 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큰 장벽이 생기고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조선족은 오랫동안 업신여김 받아오다 이제 살만한 동포 만나니 나름 기대가 있었고 우린 우리대로 같은 동포이니, 말도 통하니 거는 기대가 컸다.
하지만 조선족은 이미 3세, 4세를 거치며 완전 중국인이 된 이들이다. 어찌 우리와 생각이 같을 수 있나? 결국 서로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면서 중국인들보다도 더 어렵고 불편한 관계가 된 게다.
친구넘 회사는 회사라고 볼 수 없었다. 민박집에서 출퇴근하며 업무를 점검하는데 완전히 개판이었다. 가장 큰 문젠 서류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데, 물어보면 다 기억하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게다가 이리저리 탐문해 보니 돈 세는 게 눈에 보였다.
참고로, 정확하진 않지만, 중국에선 영업 사원들이 챙기는 커미션이 따로 있다고 들었다. 즉 회사에서 준 가격이 100원이라면 담당 영업사원은 150원 불러놓고 쇼부를 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엔 분명히 삥땅이었지만 그 사람들 입장에선 능력이었고 설사 회사에서 알아도 간섭을 하지 않는다나?
애당초 내가 이를 인정하고 들어갔다면 문제없이 이우에 정착했을 게다. 그리고 사장이 알 건 모르건, 당장 불만이 없는데 내가 뭐라고 그 구전 갖고 난리를 피우냐. 하지만 그땐 맞았고 지금은 틀렸다.
슬슬 가시내의 도적질을 보고하기 시작하자 이건 또 뭐여? 친구넘이 다 알고 있다는 식이다. 뭐여? 적지도 않은 돈이 매달 도망가는데, 이놈 봐라? 영리한 독자분이라면 벌써 눈치챘을 게다. 이 두년놈의 관계를.
아니, 처를 곁에 모시고도 이 개넘이 원거리 리모트 컨트롤로 첩질을 하고 자빠졌네? 얼굴 모르는 제수씨지만 하루 걸러 통화하는데 내가 무슨 꼬붕도 아니고 지깟넘 첩년 똥따리까지 받쳐줘야 하나 싶어 화딱지가 치밀었다.
결국 날 잡아 아작을 내버렸더니 이 년이 질질 짤면서 친구넘에게 다니네 못다니네. 놈은 한 술 더 떠서 왜 어린애 하나 건사 못하고 그러냐, 지금 나가면 어디 가서 유경험자를 뽑느냐. 기가 딱 막혔다. 당시 베이징대나 칭화대는 아니더라도 근처 유명 대학 출신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한족들이 넘쳐났는데 굳이 왜 이런 화근덩어리를 키우냐 싶었지만 어쩌누? 사장은 내가 아닌데. (나중에 들었지만 고년은 모가지 당하고 친구넘은 큰 손해를 보고 사업을 접었다나? 하여간 왜들 그 모양인지. 내가 경고한 오너들마다 깨구락지가 되어 버렸으니 이건 분명 그들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음이고 2차 책임은 무식한 나의 접근방식에 있으렷다?)
그나저나 넌 왜 나 뽑았냐? 지사 관리하라면서? 사실은 그보단 다른 목적이 있었어. 우잉? 이기 또 무신 소리고.
놈은 그제서야 속내를 드러냈다. 사실 한국의 재활용 쓰레기를 중국에 수출하고 싶은데 워낙 말썽이 많아서 힘이 든다. 니가 거기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다오. 그리고 요즘 중국으로 플라스틱 사출 공장부터 대기업까지 들어가니 가서 좀 물건 빼와라. 그럼 땅 짚고 헤엄치기로 돈 끌어모은다.
내 귀가 얼마나 얇은지 그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에 홀라당 넘어간 게다. 차라리 그때 이우에서 버티며 잡화류 수출 길이나 뚫으며 중국어나 통달했다면 지금 떵떵거렸을 텐데.
결국 쥐방울만한 기집애가 밀려난 셈이었다. 우린 소주에 지사를 하나 더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난 그전에 이우에 볼일이 많았다. 시내 중심부도 그렇지만 새롭게 올라가는 거대한 상가들을 하루 종일 쏘다니면 본 결과, 이젠 머잖아 중국이 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란 예감이었다.
우리 기업으로썬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저렴한 원가구조에 교활하기까지 한 상술을 바탕으로, 근면성과 절약 정신을 레시피로 무장한 상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당시 중국제 하면 저렴하지만 쓸만하지 않은 물건 정도로 여겼을 테지만 이미 그쪽 상가엔 드론이 나오고 있었다. 드론이 특별한 건 아니다. 리모트 컨트롤로 비행체를 움직이는 기술인데 이건 벌써 수십 년 전에 우리들도 취미로 하던 기술이다. 아마 국내 업체 중 이걸 제대로 하는 곳은 없었지만, 2007년 초입에 중국은 이미 드론과 전기 배터리로 움직이는 자전거, 삼륜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게다가 소형차부터 SUV까지 일관 공정을 갖추고 세계시장으로 출도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이젠 중국과 중국인을 멸시하지 말고 되먹잖은 선민의식으로 깔보지 말길 부탁한다. 그들이 씻지 않는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 용수 탓이 크다. 그리고 복장이 단정하지 못한 건 아끼고 사는 생활방식이 몸에 젖어서이고. 그들의 화장실을 욕하지 마라. 당시 그들보다 십수 년 전의 우리나라 화장실은 어떠했는지 아는가? 난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돌을 던지는지 궁금하다.
내가 접해 본 그들은 같은 동양인으로, 그리고 같은 한자 생활권으로, 또한 자기들이 우월하다는 의식 때문에 대체적으로 우릴 관대하게 대했고 조금만 노력하면 진짜 좋은 관계로 나갈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내가 간자가 아닌 번자체로 한자를 쓰고 읽음에 놀라워했으며 그들보다 더 박식한 중국의 역사 지식에 감탄했고, 또 충분히 존중받았다. 그러나 이건 우선 내가 먼저 그들을 같은 사람으로, 돈이 있건 없건 공평하게 대하고 정중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이 사실은 세계 어딜 가도 변치 않는다.
부디 어딜 가시더라도 같잖은 한류 따위에 흥분해서 잘난 척 말고 고개 숙이고, 점잖고 매너 있게, 사람 멸시하며 갑질 하지 말길 바란다. 수십 개 국가를 돌아다니며 난 한 번도 현지인들에게 곤란한 경우들 당한 적이 없었던 비결이다.
한 가지 재미난 광경은 인력시장이다. 당시 농촌에서 돈을 벌고자 하는 수많은 남녀노소가 도시로 흘러 들어왔는데 만약 잡 코리아가 여기서 창업했다면 이미 텐센트를 능가하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침 출근길, 이우 역 앞엔 게시물로 구인하는 광고가 수도 없이 붙어 있었고 그 앞엔 까만 머리가 숨이 막히도록 넘실 거렸다.
명동에 사람이 많다고? 상해 역 앞 가장 높은 곳에 가서 아침 출근길을 보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점들이 그냥 물처럼 출렁거리는 느낌이 들게다. 어딜 가도 사람, 정말 여긴 없겠지 하는 야산이나 들판에서도 가까이 가면 사람이 돌아다녔다.
그러니 아무리 작은 가게라도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살 수 있음은 당연하다. 지금은 미국의 위세에 눌려 뒷걸음질 치지만 사실 그들의 가장 큰 힘은 외부 시장이 없이도 돌아가는 내부 시장이란 걸 알아야 한다. 13억 시장인데 해외시장이 왜 필요하나?
중국에서 사업을 꿈꾸는 이들 중엔 허황한 income을 황당하게 계산하는 이들이 많다. 젓가락 하나씩만 팔아도 13억이 내 꺼? 젓가락 내놓기가 무섭게 바로 옆에 경쟁자가 생긴다. 결국 다 먹으려 욕심을 부리니 난처해진다. 난 한국에서 왔으니 이 정도 생활 수준은 유지해야겠고 가정부와 운전사도 있어야겠고 정원 갖춘 200평 빌라는 있어야 해. 전 재산 톡 털어 밀어 넣고선 외부인에게 모두 맡겨 버리고선, 듣기도 좋게 난 사업 상담차 골프나 쳐야지. 망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다.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청도에서 혼자 래주로 갈 때 생긴 일이다. 중국 고속버스는 아무 데나 선다. 중간중간에 브로커들이 있어 기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승차를 시켰는데 고속도로 한복판이건 상관이 없었다. 개구멍으로 들어가, 자리 있으면 앉으면 그뿐. 때론 입석도 가능. 게다가 남는 짐칸 채우고자 빙빙 돌아 2-3시간 연착은 기본.
그런데 승차하자마자 승무원이 50원을 내놓으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니 분명히 돈 줬는데 무슨 소린가? 막무가내라 난처해 하고 있을 때 뒤에서 50대 중반의 한 사내가 소릴 지르며 나오는 게 아닌가. 한참 둘이서 큰소리로 다투더니 승무원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다.
알고 보니 한국인. 뒤에서 보니 삥 뜯는 게 분명해서 나섰다는데 참 고마운 일이지 않은가. 그분은 IMF 터지면서 기아차 현장직에서 명퇴하고 전 재산을 싸 들고 해남도로 갔다고 했다. 식당을 차렸지만 경험도 전무한데다 툭하면 그만 두는 현지인 때문에 장사가 되질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소개 없이 누가 그리 하나? 결국 믿고 갔지만 현지에서 뒷받침해야 할 동포 혹은 한국인에게 뒤통수를 맞은 게 분명했다.
결국 원격으로 이혼까지 당하고 갈 곳조차 없어진 그는 청도를 거쳐 연운항까지 흘러 들어갔고 마침 개통된 한중 폐리선에서 따이콩을 하셨다나. 따이콩이 뭐냐 하면 보따리 장사치다. 본인 불건을 사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소형 화물의 운송을 해주고 수고료를 받는 시스템인데 열심히 하면 꽤 돈을 모았던 모양이다.
그는 2년 가까이 동안 죽어라 왕복했고 돈을 모아 연운항 근처에 한인 상대 슈퍼를 열어선, 한중간 소규모 무역도 간간이 해서 겨우 자리 잡았고 재혼하여 아들까지 봤다나?
우잉? 그 연세에 아들이라니 대단하셔요. 그나저나 형수님은 고령이라 난산으로 고생하셨겠네요? 고령은 무슨, 22살이여.
ㅜㅜ
존경하옵니다. 행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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