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RCA AM 모노 라디오 페어. 포노단으로 입력하면 훌륭한 진공관 앰프로 변신한다. 8인치 풀 레인지 각 1발 장착.
빈틈과 헛점에 대하여...
어제 댐도 작은 구멍 하나에 무너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이걸 좀더 응용해서 다른 이야기를 해 보려 합니다.
모든 인간과 인공 구조물에는 빈틈이나 헛점이 있습니다. 그런 빈틈들은 눈에 확연히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엔 메우 찾기 어렵고, 이미 빈틈이 수두록해 보이는 초대형 건물의 폭파조차도 엄청난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건물 곳곳을 살펴 취약부를 찾아내고 그곳에 얼마만큼의 폭약을 설치해서 어느 정도의 폭발력으로, 한편으론 주변에 주는 영향을 최소화하면서 일거에 무너뜨리는 방법은 하루 아침에 얻어질 기술력이 아닌게죠.
만약 이를 사람으로 한정하면 어떨까요? 기습 공격이 아닌 다음에야 결전이 임박했음을 자각한 상대는 취약부나 급소를 적극 보호하려 들거나 외려 헛점이 아닌 곳을 헛점인양 페인트 모션을 취해 역공을 가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일거에 쓰러뜨리는 일은 결코 쉽지도 않으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즉 앞서 언급한 대형 건물의 철거와 같이 축척된 노하우, 숙련된 눈매와 겁나 빠른 판단력이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두개의 자아..
혹시 자아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 과연 나는 무엇인가? 말들은 쉽게 나 이런 사람이야라곤 하지만 평생을 똑같은 모습으로 사는 이는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여 내가 생각하는 자아란 주변 환경에 반응하는, 그러나 오로지 내 머리 속의 존재하는, 가변의 사고체계입니다. 그러나 나름 주어진 혹은 개척한 환경에 최적화된, 일정한 규칙을 갖고 있으며 이는 특정 자극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반응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아마 성격이라 하나본데, 그마져도 사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내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나온 삶의 궤적 속에서 과연 나를 특정할 단정적인 존재가 있었는지. 아마 없을 것이고 그것은 늘 다른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했더라도, 과거, 지금, 미래의 속에 존재하는 나의 욕망을 지배하는 무언가 역시 다들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속세의 말로 악의 화신일 수도, 선의 결정체일 수도 혹은 둘이 교묘하게 뒤섞인 야누스의 얼굴을 할 수도 있으며,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아는 바로 이것, 즉 누구에게나 존재하지만 각약각색인 욕망의 덩어리, 그래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입니다.
미디어의 희생물?
요즘 들어 어느 한순간 몰락하는 이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자초했다고 혹은 미디어의 발달로 그렇다곤 하지만 내 생각엔 발달된 미디어들의 희생양이란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디어가 발달해서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가 발달해서 그런 몰락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쓰고 보니 다도 뭔 말인지... ㅎㅎ
다시 전술한 바로 돌아가서, 내면의 나와는 달리 남의 눈에 비친 내가 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의 목적은 달리 있지 않습니다. 이 사회 시스템이 원하는 혹은 그것에 가장 최적화된, 보여주기 위한 모습의 나입니다. 이는 다중 인격이나 이중 인격과는 다른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사회생활을 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은 소속된 사회가 요구하는 캐릭터로 구성된 자아와 내면의 욕망 덩어리와 끊임없이 싸우며 가능한 외면적인 자아를 유지하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자아는 나약하고 깨지기 너무나 쉬워 종종 그 아래 숨어 있는 욕망의 자아가 드러나곤 하지요.
미디어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나의 외면적인 모습이 벗겨지거나 깨져서 그 속이 드러나도 그다지 큰 충격은 없었습니다. 시간은 모든 이에게 망각이란 약을 주기 때문이죠.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열되었던 자아들의 동조화..
몇번 말했지만 현재나 다가올 미래엔, 대외적인 활동이 왕성한, 그래서 알려진 이들은 스스로 창조해낸 모습은 항상성의 유지란 강력한 사슬에 묶이게 됩니다. 그것은 본인의 의지보다 외면적 자아를 기화로 향유하는 안온함에 댓가, 즉 타의 모범이라고 하면 우스울지 모르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경계선 내에 머물며 그런 모습이 남에게 어떤 영감을 주거나 교화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인 요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어떤 이유로 무너지는 순간, 그 혹은 그녀에겐 엄청난 시련이 다가 오게 됩니다. 물론 나나 당신처럼 평범하게 사는 이들은 이런 사슬의 절대적인 영향력권에 있지 아니합니다만, 그런 우리라도 현재의 범주를 넘어설 땐 언제든지 그 유효성이 금방 되살아 납니다.
오래 전 경험입니다. 온라인에서 설전이 벌어지고 치열한 양측의 혹은 일대 다수의 공방이 이어집니다. 팽팽한 균형은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이 보였지만 뜻밖의 순간에 일방은 무너지더군요.
언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숨겨진 자아를 강제적으로 드러나게 했을 때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의 인적사항이란 단편적인 사실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간 주장해온 바와 전혀 다른 오프 라인에서의 행각일 수도 있습니다만 여하튼 드러나서 몰락하게 만드는 그 모습은/자아는 우리가 알았던 모습과/자아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갖고 있더란 거죠. 또 그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케이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요즘 난 이것이 과연, 어떤 존재로든 변화할 수 있는 온라인상에서만 유효한지에 대해선 의구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별 내용도 아닌, 루머에 유명인이 자살을 하고, 갑남을녀에게 벌어질 수 있는 평범한 애정사에 잘나가던 정객과 사회 지도자가 몰락하곤 두번 다시 재기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죠.
Why?
이젠 더이상 온과 오프를 구분하는 선긋기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온라인에서 창조한 새로운 자아는 현실 세계의 자아와 융합되어 불가분의 관계로 변화되었다는 뜻이죠. 다시 말하자면 온 혹은 오프에서 따로 잘만 유지하면 서로 영향을 주지 않았던 관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성장하는 관계로 이동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새로운 의소 소통 시스템인 SNS는 실시간 동조화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남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든 자아는 순식간에 현실의 자아여야 한다는 사슬에 묶이죠. 도저히 남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작은 실수도 가공의 자아에게 부여된 사회적 기대치에 어긋나는 순간, 가혹한 형벌이 가해집니다.
가끔 남자들끼리 바지를 확 내리는 장난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무척 당황하고 화를 냅니다. 또한 장난이라고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이도 장난이 아님은 알고 있습니다.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분의 노출, 망라해서 치부의 노출이라고 하며, 이 장난이 의도하는 효과란 고작해야 성기의 노출로 인한 창피이지만, 내가 의미하는 치부란 반드시 부끄러워해야 할 필요가 없는 부분까지 포괄하며 그것이 지닌 사안의 엄중함은, 당사자만 알거나 혹은 소수 눈매 좋은 이들이 애를 써야 겨우 접근할 수 있는 비밀의 정원이기도 합니다.
의미심장하죠. 내가 보기엔 전혀 부끄럽지 않은데? 그건 님 생각이고 당하는 입장에선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이해해야만 하는 죽음..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 갑니다. 만약 누군가를 몰락시키고 싶다면? 음험한 연애사를 까발린다? 만병 통치약이 아닙니다. 어떤 인간은 외려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그것조차 자신의 능력으로 둔갑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범죄적인 사실을 터뜨린다? 역시 느낌조차 없을 위인들이 득시글거립니다.즉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특효약인 추문, 루머, 가쉽거리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란 거죠. 그렇다면 누군가의 몰락을 초래할 방법은 이거 저거 마구 찔러보는 것일까? 어느 천년에?
한편 다들 알면서도 매번 잊어 먹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몰락의 이면엔 그를 가장 잘 아는 자가 숨어 있다는 사실이죠.
그들은 대상의 극적인 몰락을 초래할 헛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드러날 때의 파장까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줄 몰랐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부르는, 가장 악랄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 원인은 다양합니다. 케케묵은 은원관계일 수도, 금전이나 애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 분모는 역시 증오입니다. 모르는 사람이에게 해꼬지를 당하는 경우는 상대가 미쳤거나 도적 혹은 강도일 때 뿐입니다. 역시 아는 놈이 도적놈이란 옛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실감하겠지요?
한편 그 방법은 직접적일 수도, 간접적일 수도 있습니다. 전자야 뻔하지만 후자는 다양한 경로를 갖고 있어 아무리 찾아도 발견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죠. 여기서 또 발휘되는 기술은 차도살인지계입니다. 남의 칼을 빌려 적을 쓰러뜨리는 이 방법은 너무도 고색창연하지만 언제나 통하는 수법이기도 하죠.
그 죽음의 실체에 대하여..
공공연하게 그는 내가 자살한다면 그것은 타살일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전혀 예상치도 않았는데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고 꼬리만 길게 남기는 죽음입니다. 다들 애도하는 분위기 속에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며 이젠 영원한 침묵의 세상으로 떠나 다신 그 이유를 모를 것만 같습니다.
자살이 명확하니 부검할 필요도 없고, 동기가 담긴 담긴 유서가 있으니 타살의 의심도, 또 그런 정황도 없으니 수사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러나 누군가 숨겨진 그의 자아를 드러나게 하겠다는 뉘앙스를 풍겨 그를 극단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게 했다면?
다시 그가 한 말을 곰씹어 보죠. 내가 자살한다면 그건 타살일 것이다. 이미 자살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이는 곧 그가 늘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또한 그것은 그의 내면 깊숙이 잠재했던 모습을 누군가 알고 있고 그제까지 그가 보여준 화려한 재기의 모습 역시 서로의 비밀에 대한 침묵이 전제 조건이 아니었을까.
어느 한쪽이 밀약을 깼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공공연히 입을 열면 경천동지할 일이 생긴다 하였습니다. 그건, 내가 해석하는 바론, 나를 죽일 생각을 말라는 엄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논두렁이란 단어 하나에 누군가는 절벽에서 뛰어 내렸고 고작 4천 만원에 15층에서 투신을 했습니다. 우린 대단히 당황스럽고 심지어는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촌놈을 촌놈이라 했는데 그게 뭐가 어때서? 4천억도 해먹는 판에 고작 4천때문에? 받아들이는 자의 속을 누가 알겠습니까.
과연 그에게 던져진 돌은 무엇이었을까요? 거대 권력에 맞서 싸우다가 낭인처럼 떠돌 때도 굳건히 버텼고 지독한 악플에도 의연하게 대처하던 그의 헛점을 찔러 일거에 무너지게 한 단어는 무엇이었을까요?
한편 이런 방법을 익히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약간의 머리와 판단력만 있으면 되거든요. 하지만 오늘의 경우까지, 그간의 사례들을 감안해 보면 결코 사람이라면 사용해선 안되는, 가장 흉악한 무기라는 걸 재차 언급해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파열음을 내기 시작한 오랜 동맹, 그리고 파국..
하지만 구린내 풍기는 비밀은, 그리고 무거운 죽음은 언젠가 동맹이 깨졌을 때 참모습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겁 좀 주면 구린내 풍기던 경제계가 따를 것이라 믿었고 조작하면 어리석은 군중은 믿으리라 오판한 거죠.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권 교체의 일등 동신이 되어 영광을 이어간다. 깨졌습니다. 따르리라 믿었던 경제계는 드러나선 안될 비밀을 쥔 자들이 만든 굴레를 벗고, 얼마간의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독자 생존의 길을 택했고 군중은 등을 돌리고 있으며 만만해 보였던 정권조차 주먹을 휘두릅니다.
그리고 망각해선 아니되는 역사적 규칙을 이들은 애써 무시하고 있지 않을까요?
문헌으로 남은 역사적 사실들에서 우린 남의 비밀을 빌미로 방약무인하게 굴던 자와 세력들은 동맹의 파기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처참한 최후를 맞이 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정도를 넘어선, 가마떼기로 받는, 몇십배의 잔인한 보복. 그래서 남의 비밀을 이용하고 겁박함으로 생긴 은원은, 설사 케케묵었다 해도, 너무도 무서운 것인 동시에 영원한 강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의 무시에 대한 적절한 댓가이기도 합니다.
역사를 파묻으려 한 자, 그 위에 왜곡된 역사를 심으려 했던 자, 가장 무거워야 할 펜을 새털보다 가볍게 휘두른 자들의 종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데, 보이십니까?
뱀발꾸락지..
어제까지 괜찮았다. 오늘 아침에 이상해 보였다. 그리 긴 폭의 시간대가 아닐 것입니다. 그의 동선은, 그의 스마트 폰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그가 과거 경천동지할 일이라는 걸 입에 올렸을 때 누구도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고 누구도 캐묻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젠 그의 죽음에 대해서조차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알려 들지 않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아 보이는데, 즉 다들 겉으로만 그와 친했을 뿐, 내심은 없어져 주길 학수고대하지 않았을까. 더더욱그가 말하고 싶었던 경천동지할 일이 궁금해 집니다.
다시 그의 말을 되씹어 봅니다. 자살은 타살이다. 이는 곧 그가 어딘가에 힌트를 남겼으리라는 뉘앙스를 진하게 풍깁니다. 혹은 그의 죽음을 신호탄으로 어떤 움직임을 예고한 것일 수도 있고,
모 언론재벌에 대한 정권의 강력한 경고가 나왔습니다. 이 자들은 포졸의 수장에게 찾아가 정권도 뒤집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방약무도한 무리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떨치던 위세가 그들이 가진 비밀때문이라고 여즉 생각하나 본데 실로 가소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강력한 펜대의 근원은 사실 광범위한 구독때문이거늘.
이미 작업은 들어간 걸로 보입니다. 약간은 웃기기까지 한 커넥션, 정권의 강력한 경고, 강호 최강의 칼잡이, 어쩌면 그의 죽음은 오만방자하기 이를데 없는 매국 언론에 대한 칼질의 서막이 아닐까요? 그리고 그 마지막엔 그의 죽음에 대한 이유가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끝-
'세상 이야기 > 길 위에서 묻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SNS, 양날의 검.. (0) | 2019.07.25 |
---|---|
급소 (0) | 2019.07.21 |
무제?? (0) | 2019.07.14 |
무제 (0) | 2019.07.07 |
다재다능이 성공의 키는 아니다. (0) | 2019.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