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효과가 매우 좋다. 이젠 내 가게에도 명기란 게 들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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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잔 밤새 자지도 않고 지난 일을 읊어댔다. 하지만 그다지 가슴에 와닿지 않은 삼류 통속 소설 같았다. 어쩌라고? 마담이 하던 말이 생각났다.
'저년은 말이에요. 뱀같은 년이에요. 단 한번도 손님에게 마음을 연 적이 없다니까요. 본명도 등본 뗀 우리나 알지 아무도 몰라요.'
그런 여자가 왜 갑자기 말문이 터진 걸까. 난 자다 깨다 들으면서 대답만 했다.
'나 좀 꺼내줘요.'
'그간 남자가 하나 둘이 아니었을텐데 하필이면 나냐?'
'겪어 봐서 알아요. 당신도 잔인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인정이 남아 있어 보여요.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으론 알 수 없어요. 느낌으로 아는 거지.'
'그 느낌 한번 보기 좋게 빗나갔네. 이봐. 내 코가 석자야. 자네 문젠 좀 알아서 하지?'
'때가 오면 도와주세요. 나도 힘이 닿는 한 도울게요.'
'자네가 뭘 도와. 짐이나 되지 말어.'
'아직은 모를실 거에요. 언젠간..'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옷을 챙겨 입고선 돌아 갔다. 동이 훤하게 터오자 난 출근 준비를 하고선 회사로 나갔다. 부장과 나경운만 있었고 우린 각자의 차를 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장은 폰으로 진로를 전달했고 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기계처럼 움직였다.
새벽 6시. 개포동 주공 아파트 앞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난 그곳에서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좌회전 신호로 바뀌자 검은색 세단 하나가 조용히 달려 나왔다. 그러나 그때 대형 트럭 하나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미 터널을 빠져나와 교차로로 접근하고 있었다. 속도로 봐선 충돌이 뻔했다.
어, 뭐지 하는 순간, 트럭은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세단을 들이 박았고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그대로 깔아 뭉개고 지나갔다. 놀라 움직이려는 순간 부장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움직이지 마.'
그때였다. 감시 카메라가 달린 신호등 근방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사라지며 순식간에 신호등이 점멸로 바뀌는 것을, 그리곤 트럭의 반대편 문이 열리더니 낯익은 뒷모습이 내려 골목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난 똑똑히 보았다. 그건 정제석이었다. 그 둘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부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차 쪽으로 가게. 현장을 확인한 후 112에 신고를 하라고. 자네 정도면 어떤 진술을 해야 하는지 정도 금방 알겠지? 우린 먼저 움직이네.'
사건 현장은 참혹했다. 트럭은 세단의 좌측을 들이 박고선 그대로 깔아뭉개며 지나갔는데, 세단의 원래 높이에서 반으 눌린 상태였고 운전자와 조수석에 있던 동숭자의 목은 잘려나가 밖에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뒤엔 어린 남매가 있었지만 으깨진 머리 사이로 하얀 뇌수와 피가 흐르는 걸로 보아선 즉사였다.
트럭은 진행 방향에서 약간 틀어진 채 아파트 옹벽에 처박혔고 튀어 나온 운전사는 전면 윈도우를 뚫고 나와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이미 엎어진 상태에서 목이 완전 돌아가 마지막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이미 죽은 모습에 보고 기겁을 한데다, 난생 처음 사람이 코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머릿 속이 하얗게 변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냉정을 찾고 112에 신고를 했고 10분 정도 지났을까? 요란한 소리와 함께 출동한 경찰과 119 구급대가 현장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며 피해자들의 떨어져나간 부위를 수습했다.
유일한 목격자였던 나에게 경찰은 블랙 박스 제출을 요청했지만 내 차엔 원래부터 그런 건 없었다. 반대편 감시 카메라를 확인한 경찰은 하는 수 없이 현장에서 약식으로 진술을 받고 후에 서에 출두해 달란 정중한 요청을 할 밖에.
'전원 사망입니다.'
'그래? 됐어. 그만 귀사하게.'
귀사하자 말자 열린 회의 석상에서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모 그룹 회장의 이중장부를 관리하던 집사형 임원. 그러나 알 수 없는 분쟁으로 인해 좌천성 인사를 당한 후 퇴사의 압력을 받았던 모양인데 이대로 혼자 죽을 수는 없다며 심하게 반발했다나? 처음엔 적당히 돈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수십년 개처럼 충성한 댓가치곤 외려 감정의 악화만 초래할 정도의 잔돈이었을 게다.
결국 반재벌 성향의 언론과 접촉한다는 첩보를 받고선 우리에게 의뢰를 했다는데 더 놀라운 건 보수였다. 무려 50억. 범죄자들이 운영하는 심부름 센터나 청부업자에게 시켜도 될 일이지만 이런 건 기밀이 최우선이니 언젠간 돌변할 지도 모르는 이들을 믿긴 어려웠을 게다. 하지만 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죄없는 애들과 그의 부인까지 죽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표정을 살피더니 부장이 입을 뗐다.
'물론 너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하지만 사람이 그 지경이 되면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고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가장 유력한 후보자는 배우자와 가족들이야. 어쩔 수가 없었네. 관리팀이 이미 오래 전에 모니터링하면서 파악을 했네.'
'그래도 서류라든지 나머지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건 우리가 걱정할 바가 아니지. 그쪽도 사람이 있으니 알아서 처리하겠지.'
부장은 말을 이어갔다. 살인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기다. 동기가 파악되면 잡히는 건 시간 문제다. 그래서 영업팀에서 음주 운전 전과가 있는 운전자를 골랐고 사건 발생 수시간 전부터 술을 마시고 있는 운전사를 요리한 것이다. 요리? 무슨 뜻일까. 하지만 거기까지만 이라는 부장의 답변에 더이상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번 생각에 빠지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라 머릿속으론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갔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채 흐느적거리는 트럭 운전사를 미행하다가 습관처럼 차에 오르자 장제석이 따라 올라타고선 완전히 제압한다. 그러는 동안 다른 놈이 감시 카메라 근방에서 충돌 직전까지만 카메라가 작동하게 두었다가 어떤 장치로 장제석이 빠져 나오는 순간만 잠깐 멈추도록 한다. 그게 가능할까? 일시적으로 전파 방해를 하든지, 전원이 단락되도록 하면 충분할 게다.
경찰은 결국 상습 음주 운전자의 사고로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블랙 박스가 없는 나의 구두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 해도 난 죽은 이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관계도 없다. 게다가 결정적인 사건 현장이 찍힌, 그러나 장제석만 보이지 않도록 한, 영상이 있는데 날 어찌 더 추궁할까.
한편 이미 시중에 흘러다니는 그 회장의 추문에서 어떤 개연성까진 추측하겠지만 전혀 연결 고리를 발견할 수 없으니 괜시리 타초경사를 하는 우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의뢰자 측에서 그 추문과 관련된 고인의 모든 증거를 없앴을테니, 아무리 명망있는 언론이라 해도 해도 이미 죽은 자은 자의 진술만으로 기사화했다가 외려 역풍을 맞을 수 있으니 결국 검경, 언론을 한방에 잠재워 깔끔하게 게임을 끝낸 셈이다.
만약 이들이 하는 일이 주로 이런 것이라면? 나의 처음 상상과는 완전히 다르지 않는가. 고작해야 말썽꾼 회장 아들따위의 뒷치닥거리로만 알았는데 말이다. 부장의 전언으론 그런 의뢰를 한달에 두어건 정도 받는다고 하니 들어오는 수입 대비 우리에게 투자되는 금액은 그야말로 껌값에 지나지 않을 게다. 게다가 돈은 분명히 국내가 아닌 국외에서 수출입대금으로 위장된 채, 조세 피난처에 적을 둔 페이퍼 컴퍼니 사이에서만 오갈 테니 증거 없인 누구도 건드릴 수가 없겠지?
이미 빼박인 상황에서 더 이상 고민해봐야 내 머리만 아프지. 하기사 이들이 아니었다면 난 지금 영어의 몸으로 창문 없는 철창 안에 짐승처럼 갇혀 무너져 내리는 내 삶을 속절없이 지켜보는 꼬락서니였겠지. 게다가 내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아니잖나.
갑자기 엄청난 피로가 몰려 왔고 난 조용히 식사나 하겠다고 둘러대고선 일식집으로 향했다. 대낮부터 안심하고 술 마실 곳은 거기 밖에 없으니까.
'오늘 웬일이에요? 혼자 다 오시고. 그 애 부를까요?'
마담이 호들갑을 떨며 반겼지만 난 혼자 쉬고만 싶었다.
'아냐. 오늘은 혼자 마실테니 간단하게 차려 내오고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인생 참 좇같이 흐르네. 학창 시절,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동무 하나가 경고한 적이 있었다. 그런 소영웅심리가 언젠간 너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과히 틀리지 않은 예인이지 않은가. 조용히 주는 떡이나 받아 먹으며 눈만 질끈 감았다면 그날의 사달도 없었을 것이고 오늘 이런 참화에 관여하지도 않았을 것을. 대체 앞으로 난 어떻게 될까. 아니 난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 다 키워낸 부모님들과 아무 관련없는 형제들은 또 어쩌고.
술독에 빠져들면 잠깐이라도 잊을 수 있겠지. 난 글라스에 소주를 따라 연거푸 들이켰다. 목구멍을 넘어간 술은 금방 혈관을 타고 올라 머리 속에서 말발굽 소리로 변해 뇌를 흔들어댔고 12시 방향까지 올린 오디오 볼륨을 통해선 시끄러운 음악이 귓전을 때렸다.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미래의 시간들이 영상으로 변하면서 내 눈앞을 어지럽혔고 그것들은 술이 들어갈 때마다 증폭되더니 어느 한순간 오늘 아침에 죽은 자들의 얼굴로 바뀌는게 아닌가.
원귀처럼 변해버린 그들은 나를 보면 웃고 울다 원망을 했고 그 소리가 내 귀를 떠나지 않았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니 여자가 들어와서 어지럽게 널려진 상 위를 정리하고 있었다.
'뭐야.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마담이 전화를 했어요. 다른 사람 같으면 안왔겠지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던 거군요.'
'야. 그런 넘겨짚기는 뒷집 강아지도 한다. 괜히 아는 척하지 말고 조용히 치우고 꺼져라.'
'너무 마셨어요. 몇병인지나 알아요?'
상위를 보니 5-6병의 소주가 나뒹굴고 있었다. 니미, 이젠 먹은 걸 확인할 시간인가 보다 하는 순간 뭔가가 올라왔고 난 화장실로 뛰어 갔다. 켁켁 거리며 토악질을 했지만 올라오는 건 술밖에 없었다. 기분이 얼마나 더러운지.
'뭐라도 먹어가며 술을 드시든가 해야지, 깡으로 소주만 마시면 어쩌자는 거에요?'
이건 또 뭔데 마누라질이야 싶은 생각에 흘겨 보니 이 년이 간도 크게 내 등짝을 철썩 때리는게 아닌가.
'생각해서 이야기하는데 어쩌면 매번 그렇게 냉하게 말하세요? 약 좀 갖다 드려요?'
'야, 약먹으면 낫냐? 그냥 위장 겉과 속이 뒤바뀌어야 낫지. 등이나 좀 더 두들겨.'
침까지 질질 흘러내리는 순간, 아랫배에 천둥소리까지 들린다. 난 여자를 몰아내고선 시원하게 배출했다.
더러워 죽겠다는 여자의 혼잣말에 계면쩍었지만 어쩌나? 생리현상인데. 뭐 이런 더런 장면까지 글로 남기냐고? 내 마음이지. 꼬우면 보지마라. ㅋ
'물어 봐야 대답하진 않을테고, 이부자리 봐 드려요? 샤워나 하고 오세요.'
이럴 땐 해장으로 여자만한 게 없지. 게다가 부담도 주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고대의 제왕들은 전투가 끝난 후, 점령지에서 패자들에 대한 약탈과 강간을 막기는 커녕 방조 내지는 장려하지 않았는가? 그 행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건 고대나 지금이나 끔찍한 경험이고 잊지 못할 죄의식을 심어주기 마련인데 언제든지 그런 약탈과 강간을 경험해 보란 건? 실로 무서운 새끼들이 아닌가.
앞으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난 이곳의 주지육림에 묻혀 고통스런 기억을 정당함으로 바꾸고 그 댓가의 일환으로 여자들을 겁탈하며 점점 더 냉혹한 인성으로 변해가겠지? 그리고 시나브로 웃지 않는 눈을 가진 그들처럼 변해갈 게다.
샤워를 마치고 나가니 벌써 여잔 준비 태세로 누워있다. 입사 전 나라면 감히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의 미모와 육체를 가진 마물. 그러나 이젠 언제든지 내 것이다. 다시 올라오는 취기에 더해진, 참을 수 없는 욕망은 그전 잠시 동안의 고뇌를 삭제하기엔 충분했다.
뒤에서 여자의 몸속으로 진입한 난 여자의 가슴을 힘껏 움켜 잡으며 위로, 아래로 윽박질렀다. 그럴 때마다 죽은 자들의 참혹한 모습이 떠올랐지만 묘하게도 피로 얼룩진 잔상은 외려 불더미에 기름을 끼얹은 양, 나의 성욕을 자극했다. 여잔 내 몸이 박힐 때마다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고 고통스러워 하는 그 모습에 또한 쾌감을 느끼며 더욱 잔인하게 여자를 유린했다.
밖엔 구슬프게도 비가 오고 있었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긴 싫었고 어디로 가나. 갈 곳이라곤 부모님 댁밖에 없었다. 반쯤 취한 상태로 차를 몰고선 난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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