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길 위에서 묻다

그리울 얼굴...

운산티앤씨 2019. 3. 31. 01:51




맞벌이 가정이라 (당시엔 매우 드문) 우리 형제들은 조부모님들 손에서 자랐습니다. 방학을 제외한 1년 중 반은 친가에, 반은 외가에. 그러다 보니 안하무인에 욕을 얼마나 잘했는지. 00 욕쟁이 형제하면 아직도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니까요.

결국 삼남매가 되자 모친도 힘이 드셨는지 퇴직을 하셨고, 대신 우린 방학때만 되면 반은 친가에, 반은 외가에.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무난한 분위기에 어르신들 뵈러 온 삼촌들로 부터 받는 용돈도 쏠쏠했고. 무척이나 엄했던 집안 분위기 탓에 사촌 누이들은 겸상은 언감생심. 나중에사 이야기하는데 우리 형제가 그렇게 얄밉더라나요.

그러나 시간이 흘러갈 수록 찾아 뵙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급기야 대학에 진학해선 지척에 계신 분들을 뵈러 가지도 않고 난봉꾼으로 살았습니다. 어쩌다 돈이 궁해 찾아가면 백부로 부터 받은 쌈짓돈을 꺼내 누가 볼세라 내 호주머니에 넣어주며 절대 데모 하지마라. 하더라도 앞에 나서지 마라.

그러나 그 돈은 술에, 기집년들에게 흥청망청. 입대 전 친할머니가 몹시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난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고 운명하시던 날, 가시내들과 미팅을 하고 있었지요. 느닷없이 찾아온 형의 전언에 난 어찌해야 할지 멍했습니다. 시시덕거리던 가시내들이 어서 가보라는 말에 화들짝 깨어, 기차를 타고 내려 가는데 울음이 그치지 않더군요.

그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녔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 한번 보자고, 오라고 하시던 할머니 얼굴과 기집애들 앞에서 개폼 잡으며 깨춤추던 내 모습이 겹치며 얼마나 창피했던지요. 그리고 2년 후 할아버지마져 시름시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지요. 이번엔 또 그럴 수 없다하여 임종이라도 지켜려 했지만 이번엔 어른들이 막아 섭니다. 애들이 볼 일이 아니라고.

중풍이 깊어져 날 알아 보지도 못했던 외할아버지 상에는 가지도 않았지요.

이상합니다. 그렇게 살갑던 피붙이들이었고, 이젠 나눌 이야기도 한없이 많을텐데, 그리고 하나 둘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데도 난 감각이 없습니다. 고작해야 모친께 '가봐야 할까?' '됐다, 고마. 니 형이 가잖아.' 그래, 그럼 농민의 대표가 갔으니까.'

내 경조사에 올 사람이 없을까봐 그러는게 아닙니다. 이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인가 싶어 울적해지는 거죠.

지난 주엔 외할머니의 100회 생신이었답니다. 그쯤이면 만방에 축하를 날릴만도 한데, 얼마 전 둘째 외삼촌이 돌아가신 일도 알리지 못한 터라 조용히 넘어갔나 봅니다. 그리고 어제 이모가 문자를 남겼더군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생신 직후 수술을 하셨는데 감염이 되셨나 봅디다. 외사촌 동생이 외과의로 있는 병원에 입원 중인데, 병원 측도 더이상 할 일이 없다며, 운명하실 장소를 정하라 하더라나요.

당장 내려갔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마누라는 주말 알바 뛴다고 가게 못봐 준다고 성화고 내일은 모친 생신입니다. 내일 저녁 내려가기로 작정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기다려 주실까요?

마지막으로 얼굴 뵙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정신 온전할 때 백번 찾아 뵈야지.

돌아 가신 다음 금가루를 뿌린들 누가 알아 줄까, 가시기 전에 눈 한번 맞춤만 못하거늘.

공기가, 물이 고마운 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 같습니다. 내 삶의 스승이었고 보호자였으며, 가는 순간까지 정신적인 지주였음에도, 고 얼굴을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되니 말입니다.

부모 - 유주용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https://youtu.be/V8vrsqZ8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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