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길 위에서 묻다

자유, 프리덤에 대하여..

운산티앤씨 2018. 10. 1. 09:57



자유란 단어를 구글에 치고 이미지 검색을 하면 하나같이 저 모양이다.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곳에서의 해방감. 어떤 여행사는 자유는 여행이라고 하던데.

자유, 自由, 스스로 그리고 말미암을 유. 그러니까 '자기로 인하여' 이니 모든 결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뜻이고 이는 결국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의 대한 결정권을 가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회라는 큰 틀 안에 있는 한, 그 결정권은 어느 정도는 제약을 받으니 그것을 우린 타인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의 진정한 자유라 정의하고, 그 선을 넘어서면 방종이라고 규정하지 않는가.

요는 이런 단어적인 해석을 너무도 곡해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즉 자유를 부담스러운 의무에서의 해방, 일에서의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데 사실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휴식이라고 봐야 한다. 브레이크 타임. 그러나 곧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잠깐의 눈붙임.

그러니 휴식하는 내내 불안하며 지겨운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불만만 쌓이니 매일이 힘들고 괴롭기만 한 게다. 그럴 바엔 난 차라리 휴식과 중단 없는 삶을 권하고 싶다.

솔직히 말해 보자. 매주 돌아오는 휴일이 그립지만 재충전이란 건 고작 육신의 안락함 외에 뭐가 있는가? 피폐해진 정신세계의 풍요로움을 도대체 어떻게 만들 것이며 설사 있다 해도 그 짧은 시간 안에 가능한가? 불가능한 이들이 대부분 일게다. 차라리 충전되지 않을 에너지를 찾아 헤매는 아둔함보단 그럴 시간에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돈 되는 일에 매진하는 게 낫지 않을까? 태양처럼 활활 타오르다 어느 순간 꺼지는 삶. 그것이야말로 내가 꿈꾸는 행복한 삶이다.

출근길에 아흔은 되었을 법한 노모를 모시고 가는 중년의 아들을 보았다. 그 얼굴엔 피곤함과 짜증이 가득했는데. 그러나 어찌하랴. 안고 가야 할 삶의 짐인 것을.

난 내가 누릴 유일한 자유를 그런 모습들에서 찾는다.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노화, 타인은 물론 나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인지 부재의 상태, 그로 인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래의 남은 시간들이 두렵고 저주스럽다. 그래서 나에게 자유는, 소유한 모든 에너지를 완전히 고갈 시키고, 때가 오면 과감하게 그것에 대한 의지를 실천하는 게다.

정말 사견이지만 모든 인간은 75세를 전후한 (평균 수명이 늘면 뒤로 늘어나겠지만) 되는 시점엔 생을 정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은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으며 조력과 간단하고 편안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틀어막고 있다.

난 이게 도대체 무슨 엉터리 같은 상황인지 모르겠다. 돈이 많아 똥을 싸도 치워줄 이가 있고 본인이 살 의지가 있다면 그건 이 대목에서 논외다. 하지만 삶의 에너지가 다한 이, 가진 것 없는 이, 그래서 더 이상 줄 것도 없는 이에게 왜 삶을 강요하는가? 탄생은 내 의지가 아니었으되 죽음만큼은 인간의 자유 의지로 충분하고 그로 인하여 타인에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는데 왜 막고 있는가?

혹자는 이를 악용한 재산의 갈취를 걱정하지만, 그건 얼마든지 제도적인 장치로 방지가 가능하지 않은가?

물어 보고 싶다. 내가 그 순간에 임했을 때, 법으로 막은 내 자유 의지를 충분히 보상해 줄만한 대책과 조치가 무엇인지를. 고작해야 연탄 몇 장에 공과금 내면 남는 것도 없는 몇 푼 되지 않는 돈, 그리고 좁고 춥고 더운 누추한 거주공간이 전부이다. 이걸 받고 계속 살라고?

그렇다면 그 돈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재산이 있는 자는 전혀 생산적이지 못한 일에 탕진하고 자식이 있는 자는 생때같은 자식의 고혈을 짜내야 하며, 그마저도 없는 자는 얼굴 모르는 이의 호주머니를 터는 강도 행위에 의지해야 한다.

그러함에도 계속 살아 있으라?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편 삶의 지속성이 의심되고 유지의 의지조차 의심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삶이 주는 짐의 무게를 벗어던지고 싶어하고 결국엔 충격적인 결말로 꺽인 자유 의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다.

이런 일도 전술한 바와 같은 논리로 이해를 할 수 있다. 국가가, 이 사회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란 질문이다. 늙어 비틀거리는 인생은 그나마 금전적인 보상이라도 해주지만 아직 여물지 않은 이들에겐 그마저도 없고 오로지 막말 대잔치만 해댄다.

죽을 용기로 살아라, 자살은 반대말은 살자.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젊은 놈이, 어린놈이 패기도 없이. 전부 내가 아니니 함부로 떠들어 댄다.

나는 네가 아니고 너는 내가 아닌데 어찌 서로의 아픔을 동일하게 느낄 수 있겠는가? 사랑에 실패했다고 삶을 마감하려는 자에게 똥차 뒤에 벤츠 온다고 아무리 위로해 본들. 그것을 받아들이면 다행이지만, 두 번 다시 올 수 없다고 단언한 이를 어떻게 설득하나? 머릿속에 온갖 잡음이 다 들리고 한시라도 편하게 지내지 못하는 영적으로 병든 이에게 어떤 치료가 효과를 발휘했나?

그렇다고 따뜻이 품 안에 안아주지도 않으면서 무조건 살아 있으라니 이거야말로 진정한 언어도단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가진 궁극의 자유의지는 바로 내 삶의 유지 여부를 결정권이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시스템의 유일한 조력은 그 결정을 같이 검토하고 공감해주며 행복하게 마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조동진 1집 바람부는길.m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