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초, 퇴근을 하니 집사람이 뭔가 감추는 눈치입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봐도 말끝을 흐리는 게 아무래도 수상하다 싶어 앉혀놓고 추국을 시작했습니다.
시상에... 학원 가는 버스 안에서 자주 보는 풍경, 거 있잖습니까? 본인은 영등포 쌍도끼 사건의 주범으로 어쩌고저쩌고 00검사님의 은혜를 입고 나불나불.. 하여 단 돈 얼마에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문젠 볼펜 한 자루가 아니더란 말입니다. 30만 원 인가. 하여간 지 봉급의 절반을 버스 안에서 카드로 부욱 긋고선 뒤늦게 아차, 내가 부릴 난리를 예상했으면 응당 감추어야 하지만, 말하지 않고선 못 배기는 고놈의 여자들 심뽀란.
이런 젠장..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약 가루 같은 게 깡통에 담겨 있는데 그걸 먹으면 쾌변에 생리통에 좋고, 피부가 고와지고... 어찌나 화가 나든지 버럭, 당장 취소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ㅎ.. 전화를 받을 리 있나. 난 나대로 머리끝까지 뿔이나 나 있지, 30만 원 날렸지, 전화해도 받지도 않지, 급기야 전화기를 뺏어 수십 번을 돌려 대니 받더군요. 에라이 이 개나리 십장생 같은 새끼들아부터 시작해서 할 수 있는 욕은 다 퍼붓고 당장 돈 안 내놓으면 콩밥 먹을 각오해라. 니들 이거 허가받고 파는 거냐. 환불해 준답니다. ㅋ
자, 여기까지 해줬으니 돈은 니가 통장으로 받아라. 그러나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깡통을 쪼물딱거리더니 알아서 하겠다네요. 모르겠다, 그거 먹고 탈 나면 나보고 뭐라 하지 마라.
난 대체적으로 일이 터지면 성질은 부리면서도, 같이 어떻게든 해결을 보려 합니다. 그렇다고 집사람이 사고뭉치는 아니고, 아주 가끔 조금은 황당한 일을 벌이곤 하죠.
어젠 난데없이 내가 피곤한 탓은 간 때문이야~~ 까불며 멋대로 진단을 내립니다. 간 이상 없어, 간 이상하면 얼굴에 황달 오든지 시커멓게 변하든지 해야 하는데 피둥피둥하구만, 뭔 헛소리여.
조금 있으니 폰으로 결제 문자가. ㅋ... 결국 약국에 가서 이것저것 샀나 봅니다. 결제 금액도 작지도 않네요. 퇴근 무렵 슬그머니 오더니 우린 아로나민 골드가 아닌 실버를 먹어야 한다는 둥 한참을 떠들더니 뭔가 슬며시 내놓고 먹어 보랍니다. 이거 뭐여? 약국에서 권한 건데 이거 마시면 아침에 개운하대.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이 잉간을 쥐어박을 수도 없고. 아니 의사도 아닌 양반이, 날 보지도 않고 뭔 약을 준다냐. 보나 마나 먹어도 탈 없는 것일 텐데 타깃도 없는 약이 무슨 효과를 보냐 이거지요. 결국 위약처럼 기분만 좋게 하거나.
웅? 좀 있으니 전화가 옵니다. 2년 전 급성 췌장염이 와서 쓸개를 떼냈는데 먹으면 안 된다고 설명서에 있더랍니다. 아놔 씨앙. 그러더니 자긴 쓸개 달고 있으니 먹어야겠다고. 아놔 아무거나 좀 먹지 마... 밥 잘 먹고 똥 잘 싸면 건강한 겨. 아프면 병원 가야지, 왜 자꾸 보약 타령이여.
헐... 지금 내가 나자빠지면 끝장이랍니다. ㅎㅎㅎ 내가 미쳐. 우째 저리도 세상 물정을 모르노?
오늘 어떤 주부가 양넘에게 속아 3억이나 뜯겼다지요? 사연이 궁금하기도 하고 딱하기도 하고. 그러나 댓글 보곤 기분이 확 상하더군요. 김치년부터 돌대가리.. 할 수 있는 조소와 비아냥이 가득했습니다.
게다가 요즘 젊은 츠자들이 보이스 피싱의 주 타깃이 되고 있는데...
여자들이 정말 멍청해서 그런가요? 내 기억에 여자들이 좀 아는 체하고 말대꾸 따박따박하면 어른들은 당장 되바라졌느니, 까졌느니,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다, 저렇게 싸돌아다니다 뭔 일 당하지, 살림 잘하고 애나 잘 키우면 장땡이지 뭘 나대냐. 심지어는 공부 잘하면 시집 못간다까지.
그렇게 사욕하듯 자라온 이들이 어떻게 날고 기는 사기꾼을 감당할까요? 여기서 잘난 체하는 나도 연전 기획 대출하는 놈들에게 거의 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간 적이 있습니다.
참.. 생각 같아선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고 싶지만 잘 사는 집안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지요?
나에게서 호통치고 버럭 하는 성질이 사라진 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가장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를 점점 넘어서는데 언제까지고 끝까지 책임도 지지 못할 양이면서, 가족들을 울타리 안에 가둬두고 내 말만 잘 듣는 순한 양으로 키우겠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난 아들넘은 아주 못 돼 처먹어서 담배도 숨어 피우고 잔술도 깔짝댔으면 합니다. 딸애는 지가 알아서 하는 한, 친구들 만나 놀러도 다니고 남자도 사귀어 보고, 아들 못지않게 세상과 부딪혔으면 합니다. 그리고 마누란... 뭘 하든 알아서 해라, 대신 일 터지면 알리는 거나 잊지 마라.
그리고선 일만 하되, 시선은 늘 고정하고 있습니다. 왜 늦게 오지? 어디 있지? 언제 오지 등등 간접적으로 파악하고 조금 벗어난다 싶으면 문자로만 내 걱정을 알립니다.
그래야 어느 한순간 내가 없어져도 지들이 알아서 살 게 아닙니까? 나이 오십을 넘어서니 자신감은 여전하건만 기력은 예전 같지 않고 담대함도 줄어듭니다. 예전엔 링의 사다코를 보고 기겁했지만 요즘은 그런 귀신을 보면 웃습니다. 하지만 예전 막 대하던, 모르는 이들이 갈수록 더 무서워지네요?
여전히 입에 물고 있는 담배, 틈만 나면 마시는 깡소주. 아직은 배만 튀어나와서, 그리 걱정은 하지 않지만 이 정도 연식이라면 언제든지 엔진 정지하는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그전에 각자 도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으면. 그게 유일한 나의 가족에 대한 기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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