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즐거운 하루

보험 4

운산티앤씨 2018. 4. 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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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 - 봄날은 간다


여기서 자칫 오해될 수 있는 부분은 풀고 가야겠다.

보험만 지인 영업을 하는 게 아니다. 적폐라고까지 일컬어지는 학연, 지연, 혈연 또한 우리나라 만의 병폐도 아니다.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그리고 심지어는 유럽과 동남아까지 내가 가본 모든 나라엔 그런 인연을 바탕을 깔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게 바로 개인의 히스토리이고 현실 속의 인간관계인데, 어찌 그 영역을 벗어나 사업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같은 영업방식임에도 불구하고 보험만 그렇게 욕을 먹는 이유는 누구나 생각하기 싫어하는 죽음과 사고, 질병을 주제로 삼음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나에겐 결코 생기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인간의 망상이며 세 번짼 욕을 먹어도 싼 보험회사들의 작태들이다. 이 마지막 이유는 그야말로 아무리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이라도 어느 정도 공적인 책임을 진 만큼 철두철미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허나 응당 줘야 할 보험금을 주지 않을 땐, 난 나름 이유가 있다고 우선 판단한다. 약관에 없는 내용이면 당연히 줄 수 없음이고 필수 고지 내용의 사기적인 미고지도 지급 불가의 원인이 된다. 신문기사에 종종 보험사의 보험금 미지급 문제는 전후 사정을 꼼꼼히 따져봐야 하는 경우가 많음을 직시하시기 바란다. 오히려 난 보험에 대한 편견을 이용한 옐로 저널리즘을 더 의심하는 편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어느 날 바뀐 회사의 정책 때문에 그동안 가져온 신념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린 영업사원의 애환을 아시는지?

처음 종신보험을 판매했을 때도 그러했다. 누구나 지출 여력은 한계가 있는 법, 아무리 내가 죽고 난 후를 걱정한다지만 일찍 죽지 않고 늙어갈 경우는? 연금이 정답이다. 애들이 갑자기 다치거나 아프다면? 몇 푼 안되는 보험료로 충분히 보장받고 나중에 원금까지 찾을 수 있었던 게 당시의 현실이었다.

게다가 병으로만 자리 깔고 누우라는 법이 있는가? 길을 걷다 돌에 맞을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화재로 폭발하는 차에서 튀어나온 볼트에 눈이 멀 수도 있다.

난 선진국의 사례와 당시의 금리 추세를 보고 머잖아 저금리 시대가 도래함을 어느 정도 예감했다. 참고로 당시 연금의 보장금리, 즉 예정금리는 최고 14%대였고 일반 질병 보험은 8%였다. 보장성으로 소멸되는 부분과 사업비를 감안해도 보통 납입 후 10년도 되기 전에 이자가 붙어가는 구조였으니 잘만 버티면 훗날 가정사에 큰 도움이 될 건 자명했다.

하지만 문젠 이걸 치고 들어가자니 다들 금전적 여유가 너무 없었다. 해서 외국계 생보사들은 국내 보험사의 파산 가능성을 (IMF가 좋은 비유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후진적인 금융 구조를 빌미로, 심지어는 젊어서 열심히 일해 저축이나 투자를 해야지 보험이 낀 연금이냐, 그리고 당장의 현금이 20년 후 가질 가치까지 도표로 그려가며 사람들을 겁박하며 소위 말하는 바꿔치기 영업을 한 게다.

혹시 이 글을 보실 보험 영업 사원 중 과거 나와 같은 때 활동하신 분이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그렇게 주창하신 죽음이 정말 타인의 노후까지 담보할 정도로 절박했는지.

한편 국내 보험사는 그들대로 똥줄이 탔던 모양이었다. 예정금리는 확약이고 파산이 아니라면 줘야 할 부채나 마찬가지. 일설엔 우리나라 보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여성시대... 와 이름도 잊어버린 어린이 보험을 개발한 계리사가 포상 후 몇 년이 지나선 징계를 받았다나? 이게 왜 그 사람에게 내릴 징계인가?

장기적인 안목도 없이 눈앞의 실적에 매달려 판매를 허락한 경영층의 책임이 아닌가? 하여 국내사들은 고율의 예정금리로 계약된 연금과 보장성 보험을 보다 긴, 즉 다시 말해서 해약 가능성이 높은 종신보험으로 갈아치우고자 혈안이 된 게다.

내 양심상 난 도저히 그런 짓을 할 자신이 없었다. 난 전체 소득의 최저 10%, 최고 15%란 경계선을 만들고 그 안에서만 영업을 했다. 심지어
외국계 보험사의 협박에 겁을 먹은 여인네들이 전부 해약하고 남편의 종신보험으로 갈아타려는걸, 차라리 나와 계약하지 않아도 좋으니, 수도 없이 뜯어말렸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나마 덜 욕먹을 짓을 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지점 분위기는 날로 흉흉해져 갔다. 하루는 매니저가 진지하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요는 홈페이지 영업을 접어달라, 정 불가능하면 다른 이들처럼 회의도 참석하고 같이 손뼉이라도 쳐 달라고 말이다. 나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다들 출근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월요일 오전 늘어지게 자고선 컴퓨터 화면 열어 답변 몇 개 해주고 식구들이랑 저녁에 뭐 먹지? 내일은 어디로 놀러 갈까. 그리고선 수요일 오전에 차를 몰고선 나갔다.

영업하러? 노~~~ 계약하러.

난 수요일 오전에 잠깐 지점에 들러 청약서와 약관 따윌 챙겨들고 서울, 대전, 전주, 군산, 광주를 들러 88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가, 대구 찍고 구미 들러, 때론 강릉이나 속초로 갔다. 한번 내려가면 계약을 10건 이상, 그리고 금액상으로 남들의 2-3배를 해오는 데다 계약자들과 만나 밥 먹고 술 마시고. 물론 내가 돈 낸 적은 없다. 하두 궁금해하길래 귀띔으로 해준 게 전부인데 그게 온 지점 안에 퍼졌던 모양이었다.

그리곤 금요일 저녁에 친구들과 술 약속을 하고 퇴근, 토요일 아침까지 진탕 퍼마시며 보험 가입하지 않은 녀석들에게 호통을 쳐선 다시 계약. 대신 이 경우는 내가 술값을 냈다.

그렇다. 난 그들이 그려준 비전대로 생활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보고 있던 이들은 점차 동력을 잃고 지쳐가니 지점 운영진들로썬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게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모른다. 그런 즐거움 속에 새벽까지 답변 쓰고 설계서 만들던 나의 노고를. 그 많은 글과 그림과 사진, 음악들은 생각 없이 갈겨낸 똥이 아니라 피와 살을 짜내는 듯한, 살고자 버둥거리는 고통 속에서 터져 나온 나의 아우성이었음을. 그들 표현처럼, 마치 백조처럼 위론 우아하지만 수면 아래 물갈퀴의 야단이었음을.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뛴 만큼만 받아야 정상인 세상이고 난 그 룰에 따라 정상적인 생활을 했던 셈이었다. 다만 방식만 다를 뿐.

점차 거세지는 압력에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싫어도 매일 출근하고 짜증 나도 손뼉 치고. 그와 반비례해서 업적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왜? 난 이미 그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너무 멀리 가서, 지인 시장으로 되돌아와 털어먹기엔 늦은 게다.

한 달이 지나자 업무 시스템에 다음 달 해촉 대상 명단이 올라왔고 그 안에서 난 내 이름 석자를 발견했다.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건 그 전월에 난 우수 사원으로 선정되어 그 비러먹을 회사의 전무 놈과 밥을 같이 먹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결국 이런 새끼들이었구먼. 화가 머리 끝가지 치솟은 난 지점장이고 매니저고 닥치는 대로 물어버렸다. 심지어는 본사를 찾아가 기획 담당 대리를 불러 호통까지 쳤다. 그리곤 지점장의 사주를 받은 대학 후배 녀석이 날 설득하려 들기에 그 자리에서 아구창을 날려 버리고 두 번 다시 내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했다.

살기등등한 내 모습에 질렸는지 이후론 다들 입을 다물었다. 대신 나도 침묵의 약속을 했으니, 그건 다름 아닌 다른 이들과는 밥도 같이 먹지 않겠다, 혹시라도 내 영업에 대해 물어보면 절대 답하지 않겠다.

얼마나 웃기는가? 굳이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독자들께선 당시 내가 가졌을 분노와 좌절감을 느낄 게다.

난 원래 사람들과 깊이 사귀지 않으며 친구란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다. 홀로 지내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했지만, 아마 보신 분도 있을 텐데, 젊은 날 나의 눈에 비친 친구란 역겨운 존재에 대한 경멸감 때문이기도 하다.

그 후 한 달 정도 조용히 지나갔지만 이윽고 그곳에서의 시간이 멈춰야 할 사건이 다가오고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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