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야기/자작 단편

한 여름 밤의 꿈

운산티앤씨 2019. 8. 10.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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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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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yt0ViDtJ_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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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펑~~'

마치 대포 터지는 소리 같았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차는 4차선 도로의 건널목을 대각선으로 가로 질러 맞은 편에 헤비급 레슬러처럼 우람하게 서있던 가로수를 들이 박았던 모양이다. 그 충격으로 본네트 부분은 반으로 접혔고, 픽픽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오는, 연기 섞인 워셔액 사이로는 전면 윈도우를 뚫고 튀어나와 반쯤 걸려 엎어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한 사내가 보였다. 으깨진 머리에선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붉게 물들여 가까이 가서 보기 두려울 정도였다.

이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구급대, 소방차까지 뒤엉켜 일대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뭡니까? 뭐냐고요?'

'허허... 꼬라지 보니 음주구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아 계면쩍어진 난 뒤통수를 긁으며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러게. 술을 드셨으면 택시를 타실 일이지. 그나마 다른 피해자는 없으니 다행이구만.'

갑자기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쳐다보니 한 사내가 어느새 곁에 와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단정한 감청색 양복에 빨간 넥타이, 그리고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반짝이는 구두까지. 그러나 복장과는 달리 사내는 햇빛에 그을린 얼굴, 딱 벌어진 어깨와 험한 손을 갖고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표정, 마치 죽은 자를 비웃는 것처럼 보여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희안한 놈이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람. 나도 헛웃음쳤는데.

'사람 죽는 거, 누구도 모르는 한순간 불행같지만 따지고 보면 다 이유가 있지요. 저 양반도 보니 못다 푼 은원이 있었겠지요?'

'아이고 아저씨. 거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지만 듣기 참 불편하외다?'

'하하.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저 양반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나로썬 어지간히 힘들고 진 빠지는 하루였다.

'야, 너 왜 이래? 이미 잊기로 한 일을 다시 들고 오면 어떻게 하냐고. 너 참.. 속 깊을 줄 알았는데 완전 헛똑똑이구나. 야. 나까지 엮어 망치지 마라. 이제 하루 남았어. 하루만 눈 감으면 평생 비단길을 걸을텐데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또 말해줘? 넌 그렇다 치고. 제수씨하고 애들은 어쩔거야. 정신 좀 차려, 인마.'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스치면서 난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때달았다. 어쩌나? 그래, 이놈 말처럼 다 잊자. 하루만 참으면 되잖아? 나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를 일인데, 그리고 그 댓가로 뭘 얻은 것도 아니고 오로지 내 실력으로 오늘까지 살아 오지 않았는가.

고심참담한 끝에 내린 양, 난 내 결단에 나름의 정당성과 합리화를 부여하며 마지막까지 남아 날 괴롭히던 양심과 기억을 더운 여름 햇살 아래 불태워 버리기로 했다. 친구의 사무실을 나와 난 아무도 없는 공원 벤치에 앉아 머리 속을 어지럽히던 그 기억들을, 마치 화로 속으로 오래된 사진들을 던져 태우듯 지워갔다. 이렇게 억울한 사연 하나가 묻혀 가는군. 그때였다. 갑자기 요란하게 폰이 울렸다.

'김형용씨?'

'네.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아니지. 김이사님이시라고요? 전 권태형이라고 합니다. 혹시 이만희씨라고 기억하시나요?'

난 순간 얼어 붙고 말았다. 지금 지우고 있는 기억들 속에 독사처럼 오도커니,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이름. 대체 이 자는 누구지? 뭐 이런 개같은 우연이 다 있나?

'네네? 누구라고요?'

'이.만.희.씨요.'

'글쎄 기억날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있었다.

'아, 전 그 분 외손자됩니다. 얼마 전 저희 모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김이사님 말씀을 하셔서. 여쭤 볼 것도 있고 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좀 있으실까요?'

'그. 그게.. 오늘은..'

'그러지 마시고 시간 좀 내시죠? 거절할 입장이 아니실텐데?'

부드럽던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거절의 기미를 내비추는 순간, 단호한 요구로 변했다. 그리고 거절할 입장이 아니라는 말에 난 온 몸에 힘이 빠지면서 도살장 앞에 선 소처럼 고분고분해질 수 밖에 없었다. 뭘 알고 있을까? 그건 그네들 가족들이라 해도 알 리가 없을텐데? 외손자라니?

이만희와 관련된 일이라면 거절할 수 없는 이유가 나에겐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자를 만나는 걸 누구든 알아서도 안되는 입장이었다. 퇴근 무렵, 난 회사 근처 한식집에 방을 예약했고 먼저 도착해서 그를 기다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들어오란 답을 하기도 전에 낮선 사내 하나가 쑥 들어왔다. 우린 악수를 하고선 자리에 앉았고 곧 음식과 술이 한 상 가득히 차려졌다. 그는 말없이 술병을 들어, 나와 그의 잔에 가득 채우고선 건배 제의도 없이 먼저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답답하고 무엇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혹시 알지도 모를 그 일에 대한 내 난처한 입장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돌아가신 모친 말씀으론 외조부와 관련된 일을 부탁 받으신 적이 있으시다고요. 사실 저희 집안에 우환이 좀 많았어야죠? 선친께선 제가 걷기도 전에 사라지신데다 워낙 재산이 없었던 터라 대학도 겨우 마쳤습니다.'

터질듯이 증가하는 서울 인구를 감당하다 못한 정부에선 경기도 몇군데를 신도시로 지정하여 인구 분산을 도모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그때문에 온 나라가 개발의 광풍에 휩쌓였고, 그 광풍은 내가 살던 읍내까지 불어 닥쳤다. 갑자기 늘어난 외지인들로 인해 저녁 8시만 되면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이던 촌동네는 눈먼 돈을 쥐려는 자들로 인해 불야성을 이루었다. 하지만 그건 땅을 갖고 있는 이들을 위한 잔치였을 뿐, 우리처럼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더부살이들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다.

넘쳐나는 돈은 사람들의 혼을 빼놓았고 여기저기서 불륜이네 이혼이다 부터 재산다툼으로 인한 피붙이 간 칼부림까지, 하루도 조용하지 않은 날이 없을 정도였다. 부모님들은 행여 내가 헛바람이 들어 엉뚱한 짓이라도 할까봐 노심초사했지만 서울에 있는 명문대로 진학해서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던 난 옆도 돌아보지 않고 대학 입시만 준비했다.

그런 내가 기특했는지 주인집 할아버지, 즉 이만희씨는 유달리 날 귀여워 했고 어떤 땐 그 집 애들과 다툼이 있어도 외려 자기 피붙이를 혼내곤 했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자도 그의 손자 중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난 본 적이 없다. 외손자라서? 그런데 외손자가 있었던가?

영감은, 나와 손주들에겐 더없이 자상했지만, 밖에선 외골수 혹은 고집불퉁으로 통했고 그 미친 바람 속에서도 끄덕도 않고 묵묵히 농사만 지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개발구역은 확대되더니 어느새 영감의 전답 근처까지 밀려 들어왔다. 그 덕에, 오래 전엔 그다지 가치 없는 농토는 그야말로 노른자위가 되었고 그때부터 양복 입은 수상쩍은 자들이 영감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끔 그들이 마주 앉은 방에서 고성과 욕설이 흘러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 보시던 부친께선 영감의 융통성 없음을 성토하면서도 한편으론 저러다가 큰일나겠다고 걱정을 하시곤 했다.

점점 더 상황은 고약하게 바뀌어 갔다. 이미 주변 땅을 오래 전부터 야금야금 매입해왔던 건설회사 입장에선 영감의 땅이 알박기처럼 되어 버린 셈이지만 영감의 생각은 달랐다. 내가 여기 먼저 왔으니 그건 니들 사정이고, 이리도 날 강압적으로 밀어 붙인다면 강도질과 다를 바 있느냐. 자칫 전체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한 회사에선 몸이 달아 설득하려 갖은 애를 썼지만 영감은 요지부동으로 버텼다. 처음엔 대리니 과장이니 하는 졸개들이 찾아오더니, 뜻대로 되질 않자 결국 건달을 거느린 사장까지 찾아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다.

사위란 이가 찾아온 때가 그즈음이었을 게다. 당당한 체구에 사내답게 생긴 외모는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내와 몹시 흡사했다. 생긴 외모처럼 성격 또한 화통하고 정의로웠던 사위는 장인의 일을 듣고선 분기탱천했던 모양이었고 그 길로 건설회사의 현장사무실에 찾아가선 한바탕 난리를 부렸다고 한다.

며칠 후 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늦은 하교 길에 멀리서 그 사위가 걸어오고 있었고 그 뒤론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승합차 한대가 보였다. 승합차는 거리를 좁히는가 싶더니 갑자기 굉음을 내며 그에게 돌진했고 그는 마치 헝겊인형처럼 튀어 올라 논바닥으로 굴렀다. 그리고 차에서 나온 수명의 떡대들이 논바닥으로 뛰어 들어 그를 들쳐 엎고선 사라지는 게 아닌가.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분명히 기억하는 건, 차 안에 앉아 그들에게 지시를 했던 이가 바로 며칠 전 문잔박대를 당하고 얼굴이 벌개져서 돌아간 사장이란 작자였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해야 마땅했지만 인생의 향배를 가늠할 대입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난 괜한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고 결국 침묵을 지켰다. 한편 영감은 이틑날까지 귀가하지 않는 사위를 찾아 온 동네를 수소문했지만 소득이 없었고, 단지 사고가 났던 자리에 떨어진 핏자국과 사위의 지갑만이 뭔가 흉축한 일이 벌어졌음을 짐작하게 했다.

소식을 들은 딸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하고선 병원으로 실려갔다나? 영감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졌고 말이 없어졌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하지만 나이치곤 영악하고 눈치가 빨랐던 난 그 일에 개입되는 순간, 목표로 하는 대학 진학 공부에 방해도 될 뿐아니라, 몇번인가 마주쳤던 그 떡대들 뒤에 도사리고 있을 거대한 세력과의 다툼에 휘말려 나는 물론 가족까지 다칠까봐 두려웠다.

그런 와중에도 건설사의 협박은 끊이지 않았다. 어떤 땐 영감이 기르던 가축들이 쥐약을 먹고 죽어 나갔고 손자 중 하나는 교통사고를 당해 반신불수가 될 정도로 크게 다쳤다. 난 그런 일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더욱 두려워졌고, 혹부리 영감의 혹주머니처럼 커진 두려움의 무게는 자물쇠처럼 내 입을 굳게 걸어 버렸다.

버티다 못한 영감은 결국 건설사가 내미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고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는 날, 마당을 질러 방으로 가던 날 보더니 방으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꺼이꺼이 통곡을 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빡빡머리 고등학생에게 토해냈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참담함이 가슴을 휩쓸고 지나갔다.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형용아. 내 부탁 좀 들어다오.'

'말씀하세요.'

'내가 널 그간 귀여워한 건 모질이 내 손자들보다 똑똑하고 때묻지 않은 착한 성정때문이다. 내 이래뵈도 사람 관상을 좀 본다. 지금은 이런 촌구석에서 썩고 있지만 분명히 넌 크게 될 상이다. 하지만 도움 없이는 어렵지. 넌 사람이 죽고 난 후 어떻게 된다고 생각하냐?'

'그..글쎄요.'

'누군 죽으면 천당 간다고 하고 누군 영원히 사라진다고 하지. 하지만 말이다, 난 영혼이 있다고 믿으며 또 그런 경험이 많다. 형용아. 나중에 네가 잘 되걸랑 내 억울함을 좀 풀어다오. 내 죽어서라도 너에게 도움이 되마. 약속할 수 있나? 죽어가는 늙은이가 하는 헛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지만 내가 어떻게 도와드리겠어요? 잘 아시면서...'

'너 나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지? 그건 지금 니가 나설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중에 니가 어른이 되었을 땐 분명히 도울 수가 있을 게다. 부디 약속해 주렴.'

간이 철렁하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건가? 사위가 사라진 후 내 말수가 줄긴 했고 또 영감을 피해다녔지만 그걸로 영감이 추측할 거리가 되었을까. 그런데도 저리 말씀하시는 건 그에게 우리가 몰랐던 능력이 있었음일까. 하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눈물 그렁그렁한, 세파에 치여 노쇠해 가는 육신이 토해내는 핏물 어린 하소연을 뿌리치긴 어려웠다. 내 손을 꼭 잡아쥔 영감의 눈을 바라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후, 다들 잠든 밤에 영감은 조용히 혼자서 이승을 하직했다.

영감네가 시끄러워질 때부터 부모님은 집을 옮겨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이젠 영감까지 없고 보니 더이상 남의 사정 봐줄 생각은 없어지셨나 보다. 장례가 끝나자 말자 우린 서울 변두리 단칸방으로 이사를 왔고 이후 난 그들 가족의 소식은 두번 다시 듣지 못했다.

신기한 일들은 그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온통 빚으로 시작한 식당이 갑자기 흥하기 시작하더니 불과 몇년 사이 우린 번듯한 집을 장만했고, 그 사이 난 원하던 대학의 법대에 합격을 했다. 집 안엔 웃을 일들이 끊이지 않았으나 마음 한구석은 점점 더 찜찜해지기 시작했다. 만사에는 이유가 있는 법인데 도무지 그 중 중대한 고비의 몇몇 사건들은 납득하기 어려운, 역전된 상황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혹시 이 모든 행복과 우연같은 일들이 그 영감의 영혼이 지키는 약속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말 내 말도 안될 우려가 맞다면 난 헤어나기 어려운 부채의 늪으로 빠지는 셈이 아닌가?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놓기 싫고, 놓고 싶지 않은 만큼 불필요한 위험은 회피하게 된다. 그가 약속을 이행했다면 나역시 그리 해야 할텐데 이행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나의 희생이 혹시 이 모든 걸 포기해야하는 건 아닐까. 그리고 누가 들어도 웃을 황당한 믿음때문에, 또 누구도 믿지 않는 영혼에 대한 약속을 지킨답시고 나와 가족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약속을 지킬 수 없는 평범한 길로 간다면 어떨까? 딱히 그 이유째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난 판검사를 바라는 부모님의 소원과는 전혀 다른, 일반 기업체로 취직을 했다.

이미 언급했듯이 내가 가진 영악함과 빠른 눈치는 직장 생활엔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맡는 일마다 어찌 그리 위기 한번 없이 잘 풀리는지. 특진에 특진을 거듭한 난 동기들을 5년이나 앞질러 부장으로 승진했고 올초엔 급기야 이사로 발탁되었다. 실로 그 회사에선, 심지어 동종업계에서도 전무후무한 초고속 승진이었다.

실질적인 회사의 오너인 회장은 거의 출근도 하지 않았고 먼 발치에서 보았을 뿐, 대부분 경영은 아들인 사장이 맡고 있었다. 이사로 임명되던 날, 난 드디어 회장과 독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낯설지 않은 그의 얼굴에서 난 비로소 14년 전, 잊어버리고자 애를 썼던 기억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영감의 사위를 살해했던 차 안의 인물. 바로 그였고 그 역시 내 얼굴에서 뭔가 냄새를 맡았다는 표정을지었지만 정말 그가날 알아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잠깐이지만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그가 말을 꺼냈다.

'보고는 받았지만 직접 보니 더 믿음이 가는구만. 우리 사장, 부족한 면이 많지만 자네 같이 훌륭한 보좌를 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안심이야. 그러나 보좌하는 자린 결코 쉽지 않지. 일을 하다 보면 봐선 안될 일도 있고 알아도 모른 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걸세. 그 정돈 알아서 할 수 있지?'

'네.'

'올라가는 건 쉬워. 하지만 떨어지는 건 더 쉽지. 작은 실수, 한번의 헛발질에도 추락하고 말거든. 게다가 높이 올라 갈수록 떨어질 땐 아픔도 큰 법이지.'

낮고 부드러운 톤의 충고였지만 나에겐 거부할 수 없는 협박처럼 들려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자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친구를 하나 소개하지. 내 예비 사위인데 검사야. 아, 그러고 보니 자네랑 같은 대학 출신이고 나이도 같네. 혹시 안형도라고 아는가?'

형도? 안형도라면 대학 1학년부터 형제처럼 붙어 다니던 놈이 아닌가. 졸업 즈음에 사시에 합격을 한 후, 검사로 임명되어 한참 잘 나가는 친구지만 요즘도 나와 수시로 만나 횽금을 터놓는 사이였다. 얼마 전 좋은 인연을 만났다고 자랑을 하며 머잖아 여자를 소개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여자가 회장의 딸이란 말인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토록 약속을 지키지 않고자 권력을 피했는데 사건의 가해자가 내 명줄을 쥔 자이고 어쩌면 그를 칠 수 있는 권력을 쥔 자 역시 그와 기묘한 연으로 엮여 내 앞에 등장하니 말이다.

회장과의 면담을 끝내자 말자 난 형도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에 만났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자 난 형도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한참 앞날의 발전에 대해 열나게 떠드는 잔치상에 양잿물을 끼얹은 꼴이 되어 버렸지만 나로썬 비빌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이 바로 이 친구였다.

'친구야. 너나 나나 실력 빼곤 가진 건 없잖아? 그리고 어렵게 여기까지 왔고, 앞으론 더 험한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을테지?'

'그래서?'

'그걸 지금 꺼낸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겠어? 결국 난 지방으로 좌천, 넌 회사에서 쫓겨날테고. 돈을 많이 가진 자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넌 아직 모른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이미 너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는 회장이 눈치 채는 건 시간 문제야.'

'무슨 소리야?'

'이 친구 보게나. 수사를 언제까지고 비공개로 할 수는 없어. 그리고 그게 가능해도 재판 과정에서 기소하는 내가, 증언하는 네가 드러난다는 뜻이고 그 순간부터는 회장의 칼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야. 그리고 너, 그 집안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네 가족 모두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 있냐? 우선 당장은 양심 선언했다고 신문에 나서 칭송을 받을진 몰라도, 잘리는 순간부터 널 받아주는 회사는 없을 거야. 네가 돈을 벌 수 없음은 곧 경제적인 여파가 네 가족들에게 미친다는 뜻이지. 급전직하하는 경제적 곤궁을 무작정 감내할 여자는 흔지 않지. 너 어렵게 컸다면서? 어쩌다 생긴 정의감이 네 가족을 먹여 살려줄 것 같지 않구나.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은 건이야. 우리만 모른 체하면 시효 지나고 나선 처벌할 수 없지. 그리고 이 이야긴 너와 나 밖에 모르잖아. 유일하게 알고 있으리라 짐작되는 피해자들은 오래 전에 죽었고. 증거라곤 신빙성 없는 어린 고등학생의 오래된 기억외엔 전무하지. 혐의를 입증하기 거의 불가능한 사건이니 차라리 우리 선에서 정리하자고.'

그래. 그렇지. 이미 죽은 자의 명예는 살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 영감이, 사위가 살아 돌아올 리 만무한데다 괜히 들쑤셔 소득 없이 우리만 피 볼 상황으로 전환되겠지. 그리고 그야말로 뜬금포가 아닌가. 누구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고 외려 다른 회사의 더 높은 자리로 가기 위해 야비하게 오래 전 일을 꺼내 의리를 저버린 놈으로 몰릴 수도 있지 않을까.

'친구야. 이제 그 회사는 머잖아 재계 5원권 안에 들어갈 정도로 성장하고 있어. 네가 그 회사에서 더 크게 성장하자면 회장과 나의 도움이 절실할 거야. 모르긴 해도 네가 이사로 승진하는데 사장 반대가 좀 있었다고 하더라. 회장 정보망이 굉장히 촘촘하거든. 느낌에 널 그리 빨리 승진 시킨 이가 바로 회장이 아닌가 싶다. 물론 네가 그날의 목격자인 줄은 몰랐겠지.'

술독에 빠졌다가 나온듯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겨우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와선 정신없이 잠에 곯아 떨어졌다. 새벽 5시가 지났을까. 싸늘한 느낌이 들면서 난 잠에서 깨어났다. 거실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가족들은 세상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갈증때문에 난 주방으로 물을 마시러 갔는데 식탁에 누가 앉아 있었다.

'누.누구요?'

'오래만이군.'

영감이었다. 난 잠이 덜 깬 눈을 부비고선 다시 보았지만 그 영감이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나, 아니면 진짜 귀신을 보고 있나, 그러나 그는 엄연한 현실로 앉아 있었다.

'약속은 지킬텐가?'

'무.무슨...'

'내 그간 갈 길 멈추고 자네를 약속대로 잘 돌봐 왔네. 이젠 자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이지 않는가?'

'그. 그건...'

'왜? 지키지 못하겠나?'

난 구구절절히 내가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을 읍소했다. 하지만 영감은 무표정하게 듣기만 하다가 갑자기 일갈을 했다.

'고얀 놈.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아직 며칠 더 남았으니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행여 꿈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망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댓가 역시 만만찮을테니.'

그때였다.

'여보, 혼자서 뭘 그리 떠들고 있어?'

아내였다. 난 사정을 말할 수가 없었다, 14년 전에 죽은 자가 왔다고 하나? 어떤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면 납득할 것인가? 괜히 헛기침을 하며 술이 덜 깨서 혼잣 말을 했다고 할 밖에, 그날 이후 영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꿈에 나타나 날 노려보았다. 마치 카운터 다운을 하는것처럼. 그리곤 싸늘한 표장을 짓고 사라졌고 난 그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깨어났다.

결국 공소 시효 하루 전까지 불안에 떨며 지내다 그의 외손자라는 자에게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할아버지와 무슨 약속을 하셨다는 건지 궁금하네요.'

'아니 약속이라고 할 것까진 없고. 작고하시기 며칠 전, 절 불러 당신에게 생긴 일들을 소상히 이야기 해주면서 매우 억울해 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젠간 내가 힘을 가졌을 때 한을 풀어달라고 하시더군요. 고등학생이 뭘 알겠습니까? 그저 고개만 끄덕였지요.'

'이사님 정도면 파워 좀 있지 않을까요? 굴지의 재벌 그룹에서 30대 중반에 이사라.. 하하하'

'그래 봤자 회사원입니다. 언제 잘릴지 모르죠. 내가 판검사라면 모르겠지만.'

'그래서 굳이 법조계로 안가신 건가요?'

'그게 무슨...'

난 어안이 벙벙해졌다. 넘겨 짚은 말이겠지만 나의 내심을 정화하게 찍은 질문이 아닌가.

'하하하.. 무슨 말도 되지 않을... 실력이 원인이었지 다른 건 없습니다.'

'그렇지요. 나도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곤 우린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로 술을 권하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중구난방으로 나누었다. 난 점점 더 취해갔고 나중엔 혀까지 꼬부라져 헤롱거렸다.

'어이쿠. 벌써 11시 30분이네? 너무 늦었네요. 그만 가시죠.

'어? 그러네. 오늘 멀리서 오셨으니 내가 계산하죠. 먼저 나가세요. 하하하.'

이미 오를대로 오른 취기 탓에 몸조차 가누기 힘들었다. 서빙하는 젊은 친구의 부축을 받아 겨우 계산대로 가서 카드를 꺼내느라 여기저기 뒤적이는데 식당 주인이 이상한 소릴 하지 않는가.

'저.. 오늘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아뇨. 그런 일 없는데? 끄윽...'

'혼자서 너무 많이 드셨어요. 택시 불러 드릴까요?

'뭔 소리야. 일행 있는데.. 이 친구 어디 갔어?'

밖으로 나가자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취하셨고 대접도 받았으니 오늘은 제가 모시죠. 댁이 어디신가요?'

'압구정이요. 신세 한 번 집시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전화가 울렸다.

'어.. 엄마. 웬일이유?'

'웬일이기는, 이놈아. 사무실에선 퇴근했다는데 핸드폰 연락도 안돼고. 집으로 하이 며느리도 모르고. 사람 걱정 좀 고마 시키래이. 무슨 일 있나? 와 술 취한 목소리고?'

'어. 오늘 진짜 오랜 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났거든.'

'누구?'

'엄마, 내 고등학교 때 전세 살던 집 기억하지요? 주인 영감님 외손자라는 분이 날 찾아왔어. 그래서 지나간 이야기하며 좀 마셨어요.'

'야가 지금 머라카노? 죽은 그 이만희 씨? 그 영감한테 외손자가 어디 있노?

'아이고 엄마도 세월 지나서 잘 기억 못하시는네. 영감님 사위 행방불명되고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셨다던 누님 있잖아요. 그 분 아들이야.'

'니 지금 뭐라카노? 그 가스나 남편 없어지고, 영감 죽고 온 집안 다 뿌싸짓짜나. 그 바람에 그 가스나는 사산했다 카던데 무슨 아들이 있겠노? 또 있다 케도 이제 고작 고등학생 정도일낀데 니하고 무슨 술을 마시노? 야가 돌았나? 이름이 머라 카더노?'

'어? 그렇네? 권태형이라고 하던데'

'보소. 영감. 이만희씨 외손자 중에 권태형이라고 있나?'

'어... 보자. 맞다. 그 영감이 손자들 태어나기 전에 작명하러 돌아 댕깄다 아이가. 사위 없어지고 딸래미가 놀라서 사산을 했을 때도 알라 이름 먼저 맹글었다. 성은 모르겠고 하여간에 이름이 태형이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이 자는 그렇다면 누구지? 난 그를 쳐다 보았다. 고개를 돌리며 어둠 속에서 보이는 얼굴, 그러나 좀전까지 같이 술을 마셨던 사람 좋아 보이는 그 얼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살벌하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 주변으론 벌겋게 핏기가 돌았고 눈에선 무시무시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요괴처럼 찢어진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여전히 결심을 바꾸지 않을 생각인가 보네?'

'너..넌 누구냐.'

'하기사 지금 마음을 바꾼다 해도 뭐가 달리지겠어.'

그 순간 차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달렸고 눈앞에 나무가 보인다 싶더니 이내 난 기억을 잃었다.

'이젠 갈 때가 되었군요,'

'무슨 소리요?'

사내는 말없이 손가락으로 막 차에서 꺼내 인공호흡을 하려는 운전자를 가리켰다. 처참하게 부서진 얼굴. 흘러내리는 피. 난 차마 볼 수가 없었지만 그는 내 얼굴을 잡아 억지로 그쪽으로 향하게 하면서 말했다.

'누군지 똑똑히 지켜봐.'

'헉... 저건.. '

'그래. 너야.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댓가가 뭔지 이젠 알겠어? 그만 가지.'

난 다시 눈을 부비며 그를 보았고 그제사 생각이 났다. 그는 오늘 저녁 내내 나와 술을 마셨던 이만희씨의 외손자라는 권태형이었고 동시에 내 기억의 창고에서 긴 잠을 자고 있던 영감의 사위였다.

'사망 시간 2010년 8월 18일 12:03분. 음주 운전으로 추정되며 사망 원인은 전신 다발성 골절과 뇌손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및 심정지. 사망자 성명은 보자.. 김형용. 연락처 여기 있으니까 가족에게 연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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