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시내 수리를 갔습니다. 한참 짐을 내리고 올리는데 울리는 벨소리. 날도 더워 땀이 콩죽같이 흐르는데 짜증이 화악... 하지만 일때문이라면, 흠..
작은 이모가 갑자기 전화를 했네요.
미혼인 이모는 이제 일흔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공부에 대한 열의는 대단해서, 그리고 먼저 가신 두 분의 지원 덕에 외가에선 유일한 박사님이죠. 긴 사연 접어두고, 하여간 여즉 혼자입니다.
1984년을 소환하면, 이모는 대구에 숨겨둔 내 연인이자 여사친이었습니다. 이 무슨 개당나발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똥기저귀 차고 뒤뚱거릴 무렵부터 이모는 날 안아 키웠고, 매해 방학마다 염치도 없이 찾아가는 날, 나이에 상관없이, 늘 같은 눈높이에서 말상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해서도 외가 순례는 방학때마다 이어졌고, 그렇게도 형제들의 타박을 받던 지인들과의 만남조차 모두 취소하며 날 반겨주었습니다. 때론 부모님은 이리 말씀하셨지요.
'니하고 작은 이모하고 우에 그리 닮았노?'
숨은 뜻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만, 난 스물을 넘겨서도 외가에서 한달 내내 지내며 이모와 어울려 영화를 보고, 술도 마시고. 가끔 누가 그러더군요. 연인 사이냐고. ㅎㅎㅎ 그땐 이모와 나누던 이야기 하나 하나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친가의 동갑내기 사촌들이 미팅이니 소개팅이니 해준다고 난리를 쳤어도 난 항상 이모가 우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모도 거길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받았었고, 한번은 이모때문에 마음에 들어 하던 여자애와 이별도 했습니다. 난데 없는 질투를 하기에. 뭐여, 여자는 의복이고 형제는 수족이잖아? ㅋ
그렇게 대학을 나오고 아내를 만나 삶에 바쁘다 보니 차츰 외가 식구들이 잊혀져 가더군요. 가뭄에 콩나듯 일이 생기면 반짝 낯을 비추다가 급기야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지 2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작은 삼촌, 그리고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야 두어번 얼굴을 보았네요.
참 희안한 일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건만, 그리고 울 엄마 얼굴에서도 예전 모습은 찾기 힘들었는데, 이모는 여전히 내 젊은 날의 기억 속의 그 얼굴, 그대로네요.
원래 장례식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섭섭함과 아쉬움, 원망과 미움, 안타까움 등등. 그러나 이모는 전혀 울지를 않더군요. 난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동안 많이 힘들었제. 태어나서 한번도 어메 품을 벗어난 적이 없었으니까.'
부재 중 전화를 누르니 이모가 황망하게 답을 합니다.
'oo아. 있제, 갑자기 엄마 가시던 날, 내가 약을 사왔는데... (중략) 그렇게 가시고 나니 온 집안이 너무 허전한 거라. 땅 속에 들어가실 땐 모르겠더만 내 속도 다 빈 거 갔데이. 그런데 있잖아, 사람 사는 기 다 그렇지 머. 원래 만남은 이별이 전제가 아이가. 니들 부부하고 애들은 잘 있나? 머 별 일 있겠노? 좀 지내다 보면 다 잊고 나도 제 궤도 찾아 가겠지. 서울 한 번 갈게. 잠은 재워 줄 수 있제?'
'그라모. 우리 집에 온나. 맥주나 한잔 하자, 이모야.'
내가 미쳐 답을 할 새도 없이 독백하듯 말을 이어가다 전화를 끊는데.
송글송글 맺히는 땀이야 차치하고서라도 갑자기 가슴 한켠이 콱 막힙니다. 이젠 저 양반 우짜노? 그간 형제들과 사이도 그닥 좋지 않았는데, 후사도 없고. 한동안 세운상가 앞 벤치에 앉아 생각하는데 그토록 길던 세월이 순식간에 후다닥 지나갑니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나옵디다.
날 기억하는 자들이 있는 한, 난 죽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다들 결혼하고 애를 낳고 그러나? 이모는 아마 내가 가고 나면 잊혀질 테죠. 속으론 이미 작심한 바가 있습니다. 마누라야 미쳤다고 할진 모르겠지만. 감춰둔 작은 집이 있습니다. 더 이상 이모가 일을 하지 못하는 순간, 난 그곳에 이모를 모시려고 하죠, 그리고 힘이 닿는 한 보살피려고요. 뭐.. 댓가는 없습니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아름답게 채색해 준 보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한번도 이 속을,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내 속을 알 리 없는 이모는 두렵기만 할 겁니다. 나의 도움은 애시당초 기대도 하지 않았을텐데. 그렇다면 바로 그림이 나오지 않나요? 한해가 다가올 수록 사라지는 지인들, 혼자 남을 본인. 얼마나 두려웠으면 갑자기 전화를 했을까.
이모는 참 노래를 잘 불러습니다. 가끔은 니가 이모를 닮아 매미새끼처럼 노래나 부르며 한량처럼 지내지 하는 핀잔을 들었을 정도니까...
추억을 할 때마다 지나온 내 길이 그리 길지 않았고 남은 길도 길지 않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뭔 상관이래? 지금 이 순간, 내가 아껴주어야 할 사람들 지독하게 사랑하고 때론 섭섭해도 그러려니 하면 그만인데.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는게 내 삶이란 생각이 부쩍드는 요즘입니다.
아마... 몇 년 후, 어느 겨울 날, 명동 거리에서 눈처럼 하얀 머리를 한, 관계 모호한 남녀가 지나갈 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 둘은, 철 지난 영화를 (할지 모르겠지만) 보고 나와선 시시덕거리고 있을지도, 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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